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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경 진(慶珍)은 고려 명종 때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여 공을 세웠다. 그 후 중서시랑평장사(정2품 벼슬)를 지냈다. 그의 아들이 유명한 경대승(慶大升)이다. 경진의 후손 경 번(慶蕃)은 고려 고종 때 호부상서와 평장사를 지낸 후 청주에 세거했다. 그의 증손 경복흥(慶復興)은 공민왕 때 문하시중을 역임했으며 청원부원군에 봉군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경 번을 1세조로 하고 본관을 청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시조의 묘소는 청주 서산(芧山)에 있으며, 향사는 음력 10월 10일에 한다. 경대승(慶大升,1154-1183)
충북의 성씨를 찾아서
정복규
2012.08.16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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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안이씨(淸安李氏)는 시조를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충원공파의 시조 이양길(李陽吉)의 시호는 충원(忠元)으로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공민왕 때 검교시랑, 예빈사동정을 역임했다. 왕에게 직간한 것이 화가되어 제주판관으로 내려갔다가 공민왕 5년 순절했으며, 후에 청안군에 봉해졌다. 충간공파의 시조 이한번(李漢蕃)의 시호는 충간(忠簡)으로 고려 충렬왕 때 문과에 올라 한림학사와 영광군사를 거쳐 국사원 검열관을 지냈다. 1363년(공민왕 7년) 홍건적을 막은 공으로 청안백에 봉해졌다. 청안은 충북 괴산군 청안면의 지명이다. 이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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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2.08.09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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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정금강(鄭錦綱)은 고려 말 문하시중 평장사로 조선개국 공신으로 좌의정에 오르고, 청산군에 봉해졌다. 문하시랑평장사는 고려시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 속했던 정2품의 관직으로 문하시랑이라고도 불렀다. 고려 성종 때 3성6부(三省六部)의 관제가 확립되면서 처음 설치되었으며, 문종 때 품계는 정2품이었다. 1275년(충렬왕 1) 원나라의 강요에 의해 관제가 격하될 때 중서시랑평장사와 합쳐 첨의시랑찬성사로 개칭되었다. 시조의 묘소는 강원도 춘천시 퇴계동에 있다. 시조 정금강의 세계가 실전됨으로써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으로 연산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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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2.08.02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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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일보] 시조 김치제(金致濟)는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다. 그는 조선조 예종 1년 추장문과(秋場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선교랑(宣敎郞)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적(事蹟)이 없어서 확실한 세계(世系)와 본관의 유래 등에 대해서는 상고할 길이 없다. 선교랑(宣敎郞)은 조선시대 종육품(從六品) 동반(東班) 문관(文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종육품의 상계(上階)로서 선무랑(宣務郞)보다 상위 자리이다. 처(妻)에게는 의인(宜人)의 작호(爵號)가 주어졌다. 한편 시조 김치제(金致濟)의 후손들은 후에 청산(靑山-옥천군에 속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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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2.07.26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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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일보] 시조 장유(張裕)는 장정필의 9세손으로 고려조에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낸 장몽룡(張夢龍)의 셋째 아들이다. 장유(張裕)는 고려 때 봉익대부 중추원사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공을 세워 예산군(禮山君)에 봉해졌다가 뒤에 다시 진천군(鎭川君)에 봉해졌다. 그 후 벼슬을 그만두고 진천에 낙향하여 살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진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고려시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은 실질적인 수상(首相)으로 나라의 모든 정치를 총괄했다. 1298년(충렬왕 24)에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으로 불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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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2.07.19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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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일보] 시조 송순공(宋舜恭)은 신라 때 대아찬(大阿飡)을 지냈다. 그러나 1세조는 고려 인종 때 삼중대광 문하평장사를 지낸 송인(宋仁)이다. 송인은 1125년 충북 진천군 덕산면 두촌리에서 출생했으며 후에 진천백(鎭川伯)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진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송인의 묘는 충북 진천군 덕산면 두촌리 두여지에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향사한다. 송인의 아들 송원겸은 고려 때 평장사에 올랐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한 송언기는 송원겸의 손자로 감찰어사를 역임했다. 송언기의 아우 송언상은 대장군을 지냈다. 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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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2.07.12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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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일보] 시조 임희(林曦)의 처음 이름은 임수미(林秀美)이다. 그는 고려 혜종왕비 의화왕후(義和王后)의 아버지로 고려 태조 때 문하시중평장사 삼한벽상 삼중대광 영삼사 흥화부원군 상산백(常山伯)에 봉해졌다. 상산(常山)은 진천의 옛 이름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오늘날에도 본관을 진천(鎭川)과 상산(常山) 모두 함께 쓰고 있다. 인구는 상산 본관이 진천 본관에 비해 조금 많은 편이다. 한편 시조 이후의 소목을 밝힐 수 없어 고려 고종 때 김준(金俊)과 더불어 최의(崔竩)등 무신정권을 무너뜨리고 상장군이 된 임연(林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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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2.07.05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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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일보] 시조 김사혁(金斯革)은 고려 때인 1320년 진천에서 출생했으며 원래는 강릉김씨의 시조 김주원의 후손이다. 그는 1359년(공민왕 9년) 동북면 행영병마부사가 되었고 1379년(우왕 6년)에 추밀원사가 되었다. 양광도 상원수로 있을 때 공훈으로 병부상서 판추밀원사 겸 문하부사가 되었다. 그 뒤 후손들이 강릉김씨에서 분관하여 진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김사혁의 자는 문위, 호는 절정, 시호는 충절이다. 시조의 묘소는 충북 진천군 백곡면 와곡에 있다. 주요파는 홍원파, 단천파, 참판공파, 첨추공파, 군자감공파, 곡산파, 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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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2.06.28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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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일보] 음죽이씨(陰竹李氏)의 시조 이방서(李方瑞)는 고려 때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지냈다. 이방서(李方瑞)의 손자인 이헌조(李憲兆)는 평장사를 역임하고, 음죽(陰竹)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 뒤 후손들이 이방서(李方瑞)를 시조로, 음죽(陰竹)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음죽(陰竹)은 오늘날 충청북도 음성군(陰城郡)과 경기도 이천시(利川市) 일부 지역의 옛 이름이다. 역대 주요 인물은 고려 때의 전성군(專城君) 이연호(李延昊), 장사랑(將仕郞) 이맹문(李孟文), 수문장(守門將) 이상우(李尙友) 등이 있다. 음죽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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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규
2012.06.07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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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일보] 시조 박서(朴犀)는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넷째 아들인 죽성대군 박언립의 후손으로 원래는 죽산박씨였다. 서기 1231년, 고려 고종 18년에'천하무적'몽고 기병이 고려에 침입해오자 무신정권의 최우는 할 수 없이 몽고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화의를 맺는다. 이후 1세기 동안 피나는 항쟁의 역사가 이어졌다. 당시 박서 장군은 몽고군을 여지없이 깨뜨리면서 기적 같은 '전투승리'의 한 막 기록을 남긴다. 그가 평안북도 서북면 병마사로 있을 때 구주성에 진을 치고 쳐들어오는 몽고군 살리타이를 막아낸 것이다. 박서는 그 뒤 문하시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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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2.05.31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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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일보]시조 전유(全侑)는 고려에서 밀직부사, 판도판서, 상호군 등을 지내고 관성군(管城君, 현재의 옥천)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옥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고려 때 인물은 대호군을 지낸 전필을 비롯해 이부전서 전광운, 진의부위(進義副尉) 전의, 그리고 부제학을 지낸 전지 등이 있다. 전명룡은 조선 인조 때의 인물로서 1627년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대사헌에 올랐다. 그는 도학과 문장이 뛰어나 후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옥천의 봉양서원, 영주의 방산사(方山祠)에 제향되고 있다. 전익희는 1624년 문과에 급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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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2.05.10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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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일보]옥천김씨(沃川金氏)는 한글은 같고 한자가 다른 또 다른 옥천김씨(玉川金氏)가 있다. 본관 옥천(沃川)은 충청북도 지명이고, 옥천(玉沃)은 전라북도 순창의 옛 이름이다. 이 두 성씨는 전혀 뿌리가 다르다. 그러나 한글이 똑같아 구별이 매우 어렵다. 실제로 지난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센서스에서도 한글로 옥천이라 표기돼 있어 본관 성씨를 구분할 수 없다. 당시 인구조사에서 두 성씨는 합쳐서 조사됐다. 그 뒤 15년 후인 2000년에도 구별되지 않고 모두 합쳐서 조사됐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 수도 합쳐져 있다. 옥천김씨(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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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2.04.19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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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일보]시조 김영이(金令貽)는 신라 신문왕의 넷째 아들 김익광의 후손이다. 고려 때 전객사령을 지냈다. 그의 아들 김길원(金吉元)이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 토벌에 공을 세워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해진다. 그 뒤 후손들이 영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영산은 충청북도 영동의 옛 이름이다. 그래서 영동김씨라고도 한다. 김길원의 아들 김종경은 고려 정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우찬성 겸 판의금부사를 거쳐 도총관을 지냈다. 김종경의 손자 김수온(金守溫)은 세종과 세조 때의 명신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는 세종 때'치평요람'과'의방유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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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2.04.05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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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일보]시조 장항(張沆, ?~1353·공민왕 2)의 호는 눌재(訥齋), 시호는 문현(文顯)이다. 그는 고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규정(司憲府糾正),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지냈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5년 동안 억류 당했을 때 시종한 공으로 귀국 후 나주목사, 군부판서(軍簿判書), 참리경사도감(參理經史都監) 제조(提調)를 역임했다. 그 후 1327년(충숙왕 14) 2등공신(二等功臣)에 책록되고 충혜왕 때 밀직제학(密直提學)과 평양윤(平壤尹)을 역임, 영산군(永山君)에 봉해졌다. 영산은 영동의 옛 이름이다. 13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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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2.03.29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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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일보]시조 최지강(崔之崗)은 고려조에 진사(進仕)를 지냈다. 그는 문장이 뛰어났으며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 등과 절의(節義)로써 교우했다. 조선 초에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안화(安化=연풍)에 은둔 세거했다. 그 뒤 후손들이 연풍을 본관으로 하고 그를 시조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연풍최씨는 경주최씨에서 분적됐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문헌이 없어 상계(上系)를 알 수 없다. 후손들로는 아들 최업, 손자 최극민, 증손 최치현, 4대손 최숙 등이 효행으로서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됐다. 5대손 최윤(崔潤), 6대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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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2.03.08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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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김이도(金以道)는 상산김씨(商山金氏) 시조 김수(金需)의 22세 손으로 인조 때 부사어(副司禦)를 지냈다.'정묘보(丁卯譜)'에 의하면 상주김씨(尙州金氏)에서 분관됐고, 김철수(金鐵壽)의 아들이며 1619년(광해군11) 문과에 급제, 교정(校正)에 오른 김이일(金以一)의 아우라 했다. 한편 상산(商山)은 상주(尙州)의 옛 이름이다. 따라서 상산김씨(商山金氏)는 상주김씨(尙州金氏)라고 부르기도 한다. 뿌리가 같기 때문이다. 연풍김씨의 시조 김이도는 부사어(副司禦)로 소현세자의 호위 직책을 맡고 있다가 청서(淸西)와 공서(功西) 등
충북의 성씨를 찾아서
정복규
2012.02.23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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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에 의하면 괴산최씨(槐山崔氏)의 시조는 최정발(崔正潑)로 돼 있다. 그러나 문헌이 없어 세계(世系)나 본관의 유래 등은 알 수 없다. 최정발의 아들로 조선시대의 어학자인 최세진(崔世珍)을 시조로 하기도 한다.최세진(1473(?)~1542(중종 37))은 조선조 중종 때의 한글학자로 유명하다. 그는 한글의 실용화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국어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를 많이 남겼다. 특히 훈민정음 창제 이후 침체기에 접어든 어학연구의 맥을 잇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를 받는다. 최세진은 미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충북의 성씨를 찾아서
정복규
2012.02.16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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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점씨(占氏)에 대한 자세한 자료는 없다. 그러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괴산점씨는 1985년에는 총 4가구 16명, 2000년에는 총 31가구 107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15년 만에 가구 수는 무려 8배 가량이나 크게 늘었다. 인구도 6배 가량으로 크게 늘었다. 2000년 현재 괴산점씨(槐山占氏)의 지역별 인구 현황을 보면 서울 32명, 부산 7명, 대구 3명, 인천 6명, 광주 0명, 대전 5명, 울산 0명, 경기 14명, 강원 0명, 충북 3명, 충남 6명, 전북 12명, 전남 10명, 경북 6명, 경남 3명,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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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
2012.02.09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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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음정(陰鼎)은 고려 제11대 문종(재위 1046∼1083) 37년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그러나 문헌이 없어 세계(世系)나 창씨(創氏) 유래, 본관 등은 알 수 없다. 음씨(陰氏)는 원래 중국 시평(始平=지금의 협서성(陜西省) 관중도 (關中道) 흥평현(興平縣)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로서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지는 상고할 길이 없다. 음씨(陰氏)는 196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인구 약 2500명으로 성별(姓別) 인구 순위는 121위를 차지한다. 가구수는 전국에 381가구가 있었다. 남한지역에 377가구가 있었으며 북한지
충북의 성씨를 찾아서
정복규
2012.02.02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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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强)씨는 중국 진(晋)나라의 대부 강일(强?)의 후예로 알려지고 있다. 인물로는 송나라 휘종(徽宗) 때 강준(强浚)과 송(宋)나라 이종(理宗) 때 경순(警巡) 강신(强伸) 등이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문헌이 없어 언제 누가 우리나라에 들어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한편'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송(宋)나라 휘종(徽宗) 때 사람으로, 강일(强?)의 후손인 강준명(强浚明)에 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강(强)씨는 196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인구는 275명으로 성별(姓別) 인구 순위는 제166위가 된다.
충북의 성씨를 찾아서
정복구
2012.01.26 16: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