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목련] 이향숙 수필가도도하게 걷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할까. 행여 기척에 놀라 소리라도 치면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간다. 겨우 만난 등산객인데 조금은 비겁해 보이더라도 한없이 불쌍한 눈망울로 올려다본다. 몸은 최대한 웅크려 동정심을 이끌어내야 한다. 그래야 배낭을 뒤져 먹을 것을 던져 줄 것이다.처음부터 삶이 이토록 지리멸렬하지는 않았다. 얼마 전까지 내 방이 따로 있는 큰집에서 살았다. 집사는 나를 쇼파에 앉히는 걸 좋아했다. 귀찮아서 조는 시늉을 하면 낚시놀이를 했다. 낚싯줄에 달린 생선 모양의 장난감을 잡으려고 이리 뛰고 저
백목련
충청일보
2023.02.19 14:00
-
[백목련] 정혜련 사회복지사어렸을 때는 나이가 들면 저절로 성숙하고 정답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중년이 되어 나를 돌아보고 주변을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나이 들수록 현실이라는 이유로 도전 대신 삶에 안주하거나, 편견 없이 바라보던 시선이 있던 자리를 섣부른 평가와 판단에 내주기도 한다. 옷 하나를 입어도 나이에 맞지 않는다며 멋도 부리지 못하면서, 개성 있게 입은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개개인의 차이를 인정하기보다 쉽게 일반화하며, ~사람은 ~하다고 결정지어 버리기도 한다. 흘러 흘러 살다 보
백목련
충청일보
2023.02.14 15:52
-
[백목련] 육정숙 수필가고갯마루에 올라서니 밤하늘의 별들이 쏟아져 내린 듯, 어두운 숲이 하얗게 피어나 반짝인다. 하늘과 땅, 숲과 마을의 경계가 희미해질수록 세상은 더욱 더 고요해져간다. 잿빛 하늘이 낮게 드리운 마을은 눈송이 속으로 점점 제 모습을 감추어 가고 있다.마을 어귀에 서있는 수형이 멋진 감나무도 설화로 눈이 부시다. 찬란하게 무성했던 나뭇잎들을 훌훌 떠나보낸 빈 가지에 기억처럼 까맣게 달아놓은 몇 개의 감꼭지가 설화로 다시 피었다. 아마도 지난 가을, 까치밥으로 남겨 두었던 몇 알의 붉은 홍시였을 것이다.습기 머금은
백목련
충청일보
2023.02.12 11:44
-
[백목련] 정혜련 사회복지사 저녁을 먹기 위해 냉장고를 열고 된장찌개 밀키트를 꺼냈다. 그 안에는 여섯 조각으로 친절하게 잘린 애호박과 파, 두부 한 모, 팽이버섯 한 봉지, 청양고추 하나 그리고 된장찌개 소스 한 봉지가 담겨 있었다.손질된 재료를 물에 씻어 순서대로 넣고 이십 분 남짓 끓이니 된장찌개가 완성되었다. 포장지 뜯고 씻는 시간을 포함해도 삼십 분을 넘지 않았다. 간편하고 맛도 괜찮았다. 더 빨리 먹고 싶은 사람은 완전조리된 것을 사면 된다. 우리는 된장찌개, 잡채, 갈비찜, 불고기 전골 등 대중적인 한식뿐만 아니라 일식
백목련
충청일보
2023.01.31 15:30
-
[백목련] 이향숙 수필가목화밭 풍경이 이럴까. 목화솜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 같은 눈송이가 창문 가득히 너울댄다. 아파트 정원에 꽁꽁 싸맨 아이들이 오리처럼 뒤뚱거리며 젊은 엄마를 따라 눈 맞이하는 모습이 마냥 귀엽다.두메산골의 겨울도 눈이 하얗게 내렸다. 아버지는 사랑에서 새끼를 꼬고 어머니는 뜨개질하신다. 할머니는 팔순이 되어도 어둡지 않은 눈으로 콩을 고르신다. 부엌에선 가마솥에 물고구마를 찌고 아궁이의 잔불은 밤을 굽는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어머니는 고구마가 익을 때를 아시고 가족들은 옹기종기 모여 맛있는 한때를 보낸다.동치
백목련
충청일보
2023.01.29 14:55
-
[백목련] 육정숙 수필가파도가 거세게 달려온다. 어디서부터 달려오는 것인가. 내 서있는 발밑 가까이 다가와 하얀 포말을 쏟아내며 스러져갔다.제 가고자 했던 곳에 도착은 한 것일까.어쩌다가 밀리고 밀려 도착 한 곳이 텅 빈 모래밭이라서 흰 거품만 토해내며 스러져 가는 것인가. 어떻든 거침없이 달려오는 파도소리는 듣는 이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놓는다. 통쾌했다. 마치 막혀있던 하수구가 뚫린 것처럼.나에게 길을 묻는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석양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잿빛으로 짙어가는 하늘이 오래된 목화솜
백목련
충청일보
2023.01.15 14:10
-
[백목련] 정혜련 사회복지사 와인에 치즈나 간단한 과일을 곁들여 마시면서 영화를 보거나 올드재즈를 듣는 것은 내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다. 와인 애호가는 아니기에 좋아하는 종류 몇 개만 기억해 두고 마신다. 2023년 새해를 맞아 와인과 보고 싶은 영화를 준비하고, 함께 먹을 디저트를 찾아보았다. 해도 바뀌니, 특별하게 보내고 싶어 단독으로 시도해 본 적 없는 블루치즈를 먹기로 했다. 다른 요리에 들어간 건 먹어봤지만 와인과 함께 그 자체로 즐겨 본 적은 없다. 최대한 향이 강하지 않은 입문자용을 골라 주문했다. 치즈는 다행히 1월
백목련
충청일보
2023.01.03 15:49
-
[백목련] 이향숙 수필가월동준비를 제대로 했다. 손끝도 야무지지 못하고 시간도 마땅치 않음에도 냉장고를 그득 채우게 되었다. 형제간에 김장김치 나눔 덕분이다. 시댁 가풍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지역 특성을 제대로 살려낸 언니들의 김치맛은 더할 나위 없다. 갓 담근 개성 넘치는 풍미는 어딘지 모르게 어머니의 손맛을 닮았다. 그럼에도 야식으로 군고구마를 먹다 보니 시원한 동치미 국물이 떠오른다.제철이 지나 시장에서 갓은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먹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었는지 한주먹 구하게 되었다. 인터넷을 뒤져 동치미 맛있게 담그는 법을 검색해
백목련
충청일보
2022.12.25 14:30
-
[백목련] 육정숙 수필가 겨울과 봄 사이 작은아이가 걷던 길. 기억 속의 언 강물의 소리를 찾아 기회가 될 때마다 달려가던 길. 언제부터인가 그곳에선 언 강물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근래 전 세계에서 나타나는 이상기후며 대처가 쉽지 않은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은 물론, 참혹한 전쟁이 발발하고 그 파생으로 전 세계의 경제난과 핵전쟁의 위협까지, 그 외에 소소하게 들려오는 소식마다 불안의 요소들이 차고 넘친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 국가와 국가 사이의 빠른 변화와 변칙이 점점 더 소란스럽고 서로에 대한 관계성이 복잡해져
백목련
충청일보
2022.12.18 12:55
-
[백목련] 정혜련 사회복지사 새벽에 알람을 맞추고 일어나 한국과 브라질 월드컵 후반전을 보며 글을 쓰고 있다. 한국과 브라질 스코어는 일대 사로 백승호 선수의 골이 1점을 추가했다. 축구를 잘 모르는 나를 비롯한 많은 대한민국 국민이 새벽잠을 깨우며, 월드컵만큼은 챙겨보는 이 힘은 무엇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축구의 역사는 개인적으로 볼 때 좀 난해하다. 이유는 공을 가지고 노는 유사한 게임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중세시대, 고대 로마,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에도 공을 가지고 노는 경기가 모두 발견된다. 다만 현대
백목련
충청일보
2022.12.06 16:43
-
[백목련] 이향숙 수필가반짇고리함을 열었다. 떨어진 단추를 달아 볼 요량으로 실패에 대충 꽂아 두었던 바늘의 허리를 잡았다. 흐트러져 있는 도구들을 보니 며칠 전 고수필을 뒤적이다 조선시대 여인의 규방 사물을 그린 작품을 읽은 것이 떠오른다. 선비는 필묵과 종이, 벼루로 문방사우를 삼았다면 규중 여인들은 바느질을 돕는 도구를 칠우로 여긴 작자 미상의 가전체 수필이다.하루는 칠우가 모여 공을 다툰다. 우선 척부인이 아무리 좋은 옷감이라 하더라도 치수를 재지 않으면 옷을 만들 수 없으니 자신의 공이 으뜸이라 한다. 교두각시는 자신이 잘
백목련
충청일보
2022.11.27 13:25
-
[벡목련] 육정숙 수필가 단풍잎 하나 주웠다. 예쁘고 사랑스럽다. 벌레로 인한 상처하나 없이 제 모습 그대로 단풍이 드니 더욱 곱다. 나이 듦에 있어 닮아가고 싶은 건 욕심인가. 나뭇잎에 단풍이 든다는 것은 기후 변화에 의해 잎의 엽록소가 파괴되면서 녹색이 사라지고 숨겨져 있던 다른 색소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다. 나뭇잎에 안토시아닌이 많으면 붉은색이 들고, 크산토필이 많으면 노란색, 카로티노이드가 많으면 주황색을 띄게 되는데, 일교차가 크면 클수록 단풍색이 더욱더 고와진다고 한다. 생물도 살아있으므로 비오고 바람 불어 휘둘리던
백목련
충청일보
2022.11.20 14:10
-
[백목련] 정혜련 사회복지사 아침 운동을 마치고 돌아와 운동 가방을 여니, 도로변 나무들이 나 몰래 붉은 엽서를 뿌려 놓았다. 깜짝 선물에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고, 한참을 보니, 행복하다. 엽서에는 봄날의 연두빛 희망과 여름날 초록의 열정 그리고 붉은 가을의 위로가 적혀 있었다. 사랑하고 돕고 애썼지만 아프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해 가을 나무는 위로한다. 당신이 상처받고 아프다면 그것은 사랑했다는 증거이다. 저울로 잰 듯 준 만큼 받는다면 공평하다고 느낄지도 모르나, 그런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의 사랑으로 이 세상이 오
백목련
충청일보
2022.11.13 14:30
-
[백목련] 육정숙 수필가 수많은 시간이 흘러도 자연은 어느 하나 소홀함이 없다. 언 땅을 녹이는 봄의 햇살은 포근하지만 겨우내 웅크렸던 시간을 펼치느라 노곤하다. 여름 햇살은 너무 강렬하여 감당하기가 쉽지 않아 그늘을 찾게 된다. 가을볕은 물상에 사뿐히 내려앉아 단물을 들이고 씨앗들이 잘 여물도록 다독여준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자연은 저마다의 매뉴얼로 제 역할에 충실하다. 추운 겨울 침잠에 들기 위해 나무는 이 가을에 이별 준비를 시작한다. 나뭇잎은 스스로 잎자루와 가지가 연결되었던 부위로 분비물을 내어 특수한 세포층을 만든다.
백목련
충청일보
2022.11.03 15:47
-
[백목련] 이향숙 수필가옥색 치마저고리에 파랑 물감을 들였나 보다. 새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더없이 청명하다. 그런 하늘이 짙푸른 바다와 맞닿았다. 듬성듬성 떠올라 본시 하나의 공간에 있었던 섬들은 신의 조형물답다. 충무공이 그러하였듯이 한산섬 수루戍樓에 앉아 지나는 바람에 땀을 식힌다.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그가 이곳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대서사시가 영화의 장면들처럼 파노라마가 된다. 적은 인원의 군사로 대적을 물리치며 끝내 지켜내신 덕분에 누리는 평화로움이다. 하늘을 내려 이불
백목련
충청일보
2022.10.30 14:00
-
[백목련] 정혜련 사회복지사발레공연을 보면, 한 마디의 대사도 없는데 인간의 감정이 모두 표현되는 것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공연을 보며 감탄은 했지만, 직접 내가 해볼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 무용을 해보라고 했을 때도 무용은 신체조건이 좋은 사람이 하는 거라는 편견으로 시도 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지 한 참이 지난 지금 발레를 취미로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의아해하며 다른 걸 해보라고 했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을 따라갔다.발레수업 전에 발레복, 발레슈즈, 스커트, 타이즈가
백목련
충청일보
2022.09.27 17:57
-
[백목련] 육정숙 수필가바다도 좋고 숲도 좋다. 혼자 떠나는 여행은 내 안의 나, 또 다른 나를 찾아 가는 일이다.목적지 없이 무작정 고속도로로 들어서니 근래 업무 차, 몇 번 오간 탓인 듯, 망설임 없이 남쪽으로 향했다. 의도치 않은 일은 생소함보다는 익숙함이었다.보은, 상주를 거쳐 영덕에서 동해안 7번 국도로 향했다.풋풋한 시절, 울산에서 고성까지 7번 국도를 타고 여행한 적이 있다. ‘그랬구나.’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기억을 자신도 모르게 더듬고 있었던 것이다. 삶의 굴곡을 헤쳐 오느라 늘, 산만했던 일상에서 속내를 들여다보지
백목련
충청일보
2022.09.25 14:20
-
[백목련] 정혜련 사회복지사바질페스토는 이탈리아 제노바의 전통소스로 바질잎, 마늘, 잣, 파마산 치즈, 페코리노 치즈, 올리브 오일로 만든다. 페스토(pesto)의 어원이 절구(pestle)로 전통적인 방법은 절구에 넣고 섞어서 빻는다. 이탈리아 요리가 대중화되면서 한국 가정에서도 바질페스토를 빵에 발라 먹거나 파스타나 볶음밥, 샐러드에 많이 활용하고 있다.최근 바쁜 생활에서 간단히 영양을 챙길 수 있는 샐러드를 먹다 보니, 자연히 소스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중에서 바질페스토는 영양이나 맛에서 매우 우수했다. 샐러드를 먹을 때 소스
백목련
충청일보
2022.09.13 17:17
-
[백목련] 이향숙 수필가시원하다. 멀리 바다가 보이고 작은 섬들이 산처럼 둘러앉았다. 온종일 찌푸린 날씨는 운무를 만들어 내었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언어만으로는 다 표현되지 않는 장엄한 한편의 수묵화이다. 장마가 휩쓸어간 자리에 폭염이 기승을 부린다는데 이곳은 바람마저 낭창하다.한껏 평화로운 집은 소나무 몇 그루가 수문장처럼 지키고 있다. 여백의 미를 두어 시시각각 변하는 정경을 바라볼 수 있다. 뒤뜰에는 감나무가 열매를 맺어 앙증맞은 아가의 주먹처럼 내밀었다. 까치가 손님이 온다고 알리는 것인지 이 사람을 손님으로 대접해 주
백목련
충청일보
2022.09.04 14:15
-
[백목련] 육정숙 수필가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할까. 건들거리며 서성대는 바람처럼 꽃 진 자리에 서있다. 바람을 닮아간다. 봄 언덕에 움트는 새싹처럼 기억이 돋는다. 스산한 바람을 피해 골목길로 접어들자 문득, 그 앞에서 장승이 되고 말았다. 홀렸다. 여지없이 홀린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꽃 진 자리 쓸쓸하고 외로운 풍경을 보고 넋을 놓을 일이던가. 철제 펜스 울타리로 기어오르던 붉은 열정. 그 위로 인정사정없이 유월 해 빗살이 찬란하게 부서져 내리던 오후. 붉은 빛이 낭자했다. 짙은 초록 잎으로 몽글몽글 흐르다 멈춘 혈들이 생생하
백목련
충청일보
2022.08.28 14: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