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가만히 멈추어 있는 돌이 아니다.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렇다고 끊임없이 흐르는 물 같은 것도 아니다. 한 갈래로만 흐르는 물은 가는 길만을 따라 흐른다. 그러나 사람의 움직임은 수만 갈래로 뻗치고 굽이친다. 몸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움직인다. 무엇보다 인간에게는 마음의 씀씀이가 중요하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마음을 쓰는 일이라고 보아도 된다.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행동이 드러난다. 선하게 마음을 쓸 수도 있고 악하게 마음을 쓸 수도 있으면 눈치를 보면서 그것을 쓸 수도 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무슨
자녀를 멋지게 키워 보겠다는 욕심이 자녀를 잡는 경우가 빈번하다. 놀면서 배우고 터득하는 시간을 어린이에게 돌려주어야 함을 극성맞은 어머니들은 하나도 모른다. 소꿉장난을 해야 할 나이엔 소꿉장난을 해야 인생을 배우고 터득한다. 골목에서 뛰 놀아야 할 어린이는 뛰놀아야 인생을 배우고 터득한다. 아이들에게는 그 나름의 인생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부모들이 막무가내로 아이들을 천재로 만들어야 한다는 욕심을 내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의 두뇌가 한결같은 것은 분명 아니다. 좋은 머리도 있고 처진 머리도 있으며 나쁜 머리도 있게 마련이다. 세상
선생의 말씀은 새겨서 들어야지 들리는 대로 따라하다 보면 엉뚱한 결과를 빚어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이 엉뚱한 짓을 자주하면 사람들로부터 좀 모자란다는 뒷말을 듣기가 쉬운 법이다. 조선조 선조시대 율곡선생은 분명 선각자였다. 어느 유자(儒者)보다도 시대를 앞서서 꿰뚫어 보는 정신을 율곡 선생은 간직했었다. 그래서 선생은 시샘도 많이 샀고 시기도 받았다. 그러나 명륜관 유생들은 율곡선생을 높이 받들었던 모양이다. 선생의 침모(針母)가 어느 날 도포의 왼편 가슴팍에 불구멍이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불은 붉은색이니까 빨간 헝겊
마음속에서 공자와 여래가 만났다고 상상하면 거의 환상적인 즐거움을 준다. 공자는 여래를 몰랐을 것이고 여래도 공자를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로부터 연유된 말이나 여래로부터 연유된 말을 듣다보면 서로 만나서 의견을 나누면 서로 통하는 미소를 지었을 것이라고 상상된다. 유교가 다르고 불교가 다르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생각은 서로 통하고 있다. 삶이란 고(苦)가 아니냐고 확인한 여래는 일생을 불쌍히 여겼고 삶이란 뜻있는 것으로 여겼던 공자는 인간과 그 삶을 믿었다. 물론 여래는 현실의 무상함을 앞세워 죽음 뒤의 세상
어느 나라 가정에서나 어린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는 동물이 많이 등장한다. 유태인의 가정에서 어린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도 동물에 비유 한 것이 많다. 그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영리하기로 이름난 여우 한 마리가 바닷가에 갔다. 여우는 동물 중에서 머리가 좋다는 인정을 받고 있다. 그 여우는 바다 속의 물고기들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물고기 여러분 바다 속은 위험하니까 뭍에 올라와서 우리와 함께 삽시다. 어부들이 그물을 쳐서 여러분을 잡으려고 한답니다. 또 큰 고기들이 여러분을 잡아먹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육지에
유태인의 교육은 한마디로 말하여 민족정신을 심는 교육이다.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적 전통, 그 속에 맥맥히 흐르는 민족의 얼을 계승하는 수단으로써 교육이 존재한다. 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국가 간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미국 주요도시의 공항에는 이스라엘행 비행기를 타려는 유태의 젊은이들이 차례를 기다리는 장사진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비록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시민이지만 조국 이스라엘의 국난을 가만히 앉아 보고 있을 수만 없다는 정열의 젊은이들이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용약전열에 참가하여 조국의 안전을 수호하겠다는 결
독일인 대학 교수 헤리겔이 어느 선승에게서 궁술을 배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백발백중의 기술을 익히게 되었다. 헤리겔이 스승에게 말했다. “이제 무엇이 더 있겠습니까? 이제 돌아가도 되겠지요?” 스승이 말했다. “그렇다. 돌아가도 좋다. 그러나 그대는 내 기술의 ABC도 배우지 못했다.” 헤리겔이 말했다. “ABC 라니요? 이제 제 기술은 백퍼센트 완벽합니다.” 스승이 말했다. “난 지금 명중률을 말하고 있는게 아니다. 과녁을 맞추는 것은 결코 대단한 일이 아니다. 이제 진짜 궁술을 배우도록 하라.” 헤리겔은 스승과 함께
원증회고(怨憎會苦)라 하여 원수지고 미운사람 만나는 고통이 있는데 속담에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딱 마주친다.”는 말과 같이 참으로 만나기 괴로운 고통이다. 알고 보면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사이가 부부나 사랑하는 사람사이인데 돌아서면 원수같이 냉정하고 무자비한 사이가 된다. 가장 정이 많은 사람이 갈라지고 보면 가장 잔인한 원수가 될 수 있으니 원래 원수니 적(敵)이니 없건만 탐욕이나 시기, 질투나 어리석은 정(情) 때문에 원한을 가지고 만나기조차 꺼리는 것이 원증회고(怨憎會苦)이니 반야의 지혜로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이다. 또 구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을 보면 연꽃은 아름다운 들판에 피는 것도 아니며 진흙 속에 뿌리를 박고 있으나 그 꽃은 더 없이 아름답고 흙탕물이 꽃이나 연잎에도 때 묻지 않으며 연꽃은 꽃과 열매가 동시에 생긴다하여 방화즉과(放花卽果)라 하니 이는 원래 부처와 중생(衆生)이 둘이 아니며 중생 속에 부처의 씨가 이미 잉태(孕胎)하고 있다는 것을 말함이니 어떻게 연꽃을 하찮게 보리요. 원래 선악(善惡)이니 더러우니 깨끗한 것이 초월하고 보면 오직 삼계(三界)가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며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불교의 반야심경에 부증불감(不
관세음보살의 관(觀)이란 어떤 뜻을 가진고 하니 관조(觀照)라는 뜻인데 마음의 거울에 모든 물체를 비춰본다는 것이다. 마음으로 보기 때문에 관(觀)이라 하며 눈(眼)으로 보면 견(見)이 된다. 눈으로 보면 아름답게 보이는 것도 마음으로 보면 더러운 것도 있다. 눈으로 보면 짙은 화장에 값비싼 모피 옷에 다이아몬드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며 뽐내는 미인도 함부로 몸을 팔거나 하면 그것은 지저분하고 더러운 것이며 남자 역시 부정부패로 치부하여 거들먹거리면 그 또한 추한 것이다. 색정(色情)이니 하는 것은 성인군자(聖人君子)도 여간 참아내기
버들잎은 푸르고, 꽃은 화사하고 붉고, 참새는 짹짹, 까마귀는 까악까악 우는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들이 과연 어느 정도의 실체성(實体性)이 있을까····. 그것들은 확실히 되풀이 된 감각으로 하나의 조건반사(條件反射)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일체 모든 상념(想念)은 공(空)인 것이다. 지식과 경험을 쌓아 복잡한 기억의 심층(深層)에서 발효(醱酵)하는 자아라는 관념도 실체는 없는 것이며 가공(架空)의 관념이다. 그리고 후천적 기억층의 어둠을 타파(打破)하고 진공(眞空)을 구하여 정진하는 곳에 “불교”라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의 불행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모든 불행을 자기가 만들어낸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환경도 불행의 적잖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대부분이 우리들의 생각이나 태도에 의하여 행복이나 불행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당연히 행복한 만큼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행복은 누구나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며 행복을 얻는 과정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행복을 바라고 행복을 얻기로 결심하고 올바른 방식을 배우고 활용하는
자녀교육에 관한 강연을 하거나 교육상담을 하는 기회가 있으면 으레 자녀들의 용돈 문제가 질문으로 등장한다. “어린이에게 용돈을 주는 것이 좋냐?”, “일을 시키고 그 보수로서 용돈을 주는 것이 어떠냐?”, “초등학교 학생에게 용돈을 어느 정도 주는 것이 적당한가?”, “돈을 주는 대신 먹을 것을 사다주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 아닌가?” 대개 이런 질문들을 받게 된다. 이 질문들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을 구하기 이전에 유태인의 가정교육에서 배워야할 기본적인 태도가 있는 것 같다. 유태의 가정에서는 아직 학교에 가기 이전에 자녀에게 용돈
아무리 몸부림쳐도 미친 듯이 노력해도 이 가슴 속을 도려내는 것 같은 허무한 아픔에서 자신을 구할 수는 없다. 그리고 아무리 몸부림쳐도 죽는 것 만은 자기 혼자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인간존재의 고독에서 구조 받을 수는 없다. 그리고 나는 그 “허무함”과 “고독”을 신(神)을 의지하지 않고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의 퇴로(退路)는 사랑 다만 그것뿐이다. 사랑 이외에 인간의 퇴로는 어디에도 없다. 미칠 듯이 타인을 사랑하고 미칠 듯이 인류에게 봉사하고 미칠 듯이 일을 한다. 자기가 죽어도 사랑
실패를 겁내어 아무것도 안한다고 하는 것은 최대의 죄악이다. “청춘시대의 갖가지 우매함을 가지지 않았던 인간은 중년에 이르러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할 것이다.”라고 한 것은 명언이다. “청춘의 실책(失策)은 장년(壯年)의 승리나 노년의 성공보다도 바람직한 것이다.”라고 한 것도 명언이다. 그 중에 잘못이 포함되어 있지 않는 청춘은 청춘이라고 부를 가치가 없다. 그림물감으로 아름다운 색을 내려고 할 때에 아름다운 원색(原色)만을 섞어도 참다운 아름다운 색은 나오지 않는다. 참다운 아름다운 색은 그 속에 그것과는 정반대의 더러운 원색을
인생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에게 인생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인생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인생은 가치가 없다. 다만 인생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사는 인간에게는 인생이 점차로 그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낸다. 인생을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어느 것이든 가능할 것이다. 어느 쪽이 바르다는 따위의 말을 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의 범위에는 없다. 인간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인생을 긍정적으로 보는 자에게는 인생은 긍정적으로 전개하고 인생을 부정적으로 보는 자에게는 인생은 부정적으로 전개한다는 것뿐이다. 인생을 끝까지
아무것도 모른다. 아는 것은 그래도 또한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생명의 소리이다. 그래도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있는 자신이다. 인간은 여기서부터 출발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이유는 묻지 말라. 산다는 것의 이유는 지금 살아있는 것 중에 있다. 사랑하는 것의 이유는 사랑하는 것 중에 있다. 소설(小說)의 줄거리만을 따라가 보는 것만으로는 소설을 읽는 것이 되지 않는다. 어떤 대하소설도 줄거리만으로는 대하소설이 되지 않는다. 대하소설다운 이유는 그 개요(槪要)이외의 다른 곳에 있다. 인생도 또한 같을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정직하게 말해서 인생은 자기실현의 과정일 뿐만 아니라 神을 위해서 자기를 실현해가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싶다. 나는 신에게서 도망하고 싶지 않았다. 신에게서 도망하고 싶지 않았지만 신이 필요했다. 자기의 노력의 목적이 다만 스스로의 가능성의 실현이라고 하는 것만이 아니고 무언가 영원히 이어지는 것이 필요했다. 인간은 역시 자기실현이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어떤 노력을 해도 어떻게 자기를 실현해도 결국 인간은 죽는다. 결국은 죽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역시 허무한 마음은 어찌할 수 없다. 사람이라면 태어났을 때는
사회생활에서 친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 친구를 잘못 사귄 것이 화근이 되어 크나큰 손실을 보게 되거나 범죄의 소굴에 빠지게 되는 경우를 우리 주위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반대로 좋은 친구를 가진 것이 도움이 되어 곤궁한 역경에서 벗어나거나 또 친구로부터 자극을 받아 학업에 전념하게 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우리 사회와 같이 전통적으로 인간관계 중심의 사회에서는 특히 좋은 친구를 사귄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사업을 하거나 사회적 활동을 함에 있어서 친구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어떤 재벌이 아들
'탈무드' 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임금님이 그의 신하 한 사람을 임금님에게 빨리 오도록 명령한다. 그 신하에게는 세 사람의 친구가 있는데 한 사람은 절친한 친구이고 또 한 사람은 그렇게 가까운 친구는 아니며 나머지 한 사람은 더욱 가까운 사이가 아니다. 임금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 신하는 혹시 임금님에게 야단을 맞을까봐 두려워서 세 사람의 친구에게 동행해 줄 것을 간청한다. 가장 가까운 첫 번째 친구는 이 간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두 번째 친구는 동행을 하겠지만 대궐문 앞에 까지만 함께 가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평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