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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석 섬이라굽슈?" 황인술은 부지런히 머리를 굴려 보았다. 마흔석 섬이믄 쌀이 스물두 가마니에서 반 가마니 부족한 분량이다. 여섯 식구가 3년 반 동안 먹을 수 있는 쌀이다. 아니 그 정도의 쌀만 있으면 논을 보통 답으로 다섯 마지기는 충분히 살 수 있다. "그 돈을 내년에 가실에 죄다 갚으라고 하믄 내가 도둑놈이지." 이복만은 황인술이 더 이상 계산을 하지 못하도록 막걸리 대접을 들어서 황인술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라믄유?" "어여, 그 술이나 마시고 야기하세." "아……알았시유."
한만수의 대하 장편소설 금강
한만수
2009.09.28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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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시방 자네 수중에 돈이 읎다는 점은 알고 있네. 해서 말인데 당장 논을 자네 앞으로 넘길팅게, 앞으로 농사를 지어감서 갚으믄 되네." "아이고! 그릏게만 해 주신다믄이야. 죽을 때 까지 그 은혜 갖고 갑쥬. 암유. 우리 여섯 목숨을 살려주시는 은혜를 워지 잊겄슈." 황인술은 이복만이 은근하게 속삭이는 말에 두 눈이 확 떠지는 것 같았다. 벌떡 일어나서 넙죽 절이라도 하겠다는 표정으로 이복만 앞에 엎드리며 말했다. "그릏다고 영 손해를 봄서 논을 넘겨 줄 수는 읎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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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수
2009.09.27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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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술은 이복만이 하는 말이 도지로 붙이고 있는 논을 내 놓으라는 말로 들렸다. 이복만에게서 도지를 얻어 부치고 있는 논은 다섯 마지기다. 다섯 마지기라도 해 봤자 풍작 일 때 벼를 스물 한섬 반, 평작 일 때는 스무 섬밖에 소출하지 못한다. 그 중에서 평작으로 열 섬은 도조로 받치면 열 섬이 남는다. 그 중에서 토지수득세가 한 섬 반이 나간다. 남은 여덟 섬 반으로 농협조합에서 빌린 농자금 이자며, 비료대에 구장수곡이며 이런 저런 세금을 제하고 나면 겨우 다섯 섬이 남을까 말까다. 평균 사람 한 명이 한 섬을 먹는 것으로 계산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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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수
2009.09.24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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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술이 기억을 더듬는 사이에 변쌍출이 잔기침을 하며 나섰다. "환갑잔치 하는 것 츠름 죽은……" 순배영감은 그 난리를 치던 날 동네 젊은 것들이 죽은 이복만 내우를 등에 업고 춤은 안 추었나? 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죽은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이 울컥 치솟아 올라서였다. "새삼스럽게 옛날 생각하믄 뭐햐. 다 지나간 일인디 머. 그라고 죄가 있다믄 농사꾼 자식으로 태어 난 것이 죄라믄 죄여." 순배영감의 얼굴에 일순간 그늘이 지는 것을 느낀 변쌍출이 알만하다는 얼굴로 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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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수
2009.09.23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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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룡네는 더 이상 있어 봤자 상대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팔짱을 낀 체 입술을 삐죽거리며 돌아섰다. 황인술이 턱으로 자기 집 쪽으로 가는 해룡네를 가르키며 물었다. "암 것도 아녀." 순배영감은 담배 연기를 내 뿜으며 들판 쪽을 향해 돌아앉았다. "보은댁이 이븐에 난 손자를 업고 나왔잖여. 해룡네가 갸를 보고, 머하느라 이릏게 늦게 나와서 옥천댁 맘고생이 심했니 어쨌니 했싸니께 보은댁이 승질이 나서 가 버렸잖여. 그것 땜시 그러는 거여." "먼 말인지 알겄구만유. 해룡네 말이 틀린 말은 아니구먼. 이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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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수
2009.09.22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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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년이 시방 머라고 주딩이를 찢고 있는 거여. 아……아녀……똥이 무서워서 참나, 드러워서 참는 거지. 퇘! 재수가 읎을라고 항께…… 보은댁은 더 이상 상종할 인간이 못 된다는 생각에 홱 돌아서서 집으로 향했다. 매를 맞아도 잘못한 이유를 알고 맞으면 덜 아픈 법이다. 해룡네는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보은댁에게 잘못한 말이 없었다. 순배영감과 변쌍출에게도 내가 잘못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입게 거품을 일어나도록 물어 보아도 대답은 하지 않고 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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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수
2009.09.21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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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에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들판을 쳐다보던 해룡네가 설사병 걸린 사람 뒷간 찾는 걸음으로 달려와서 승우의 얼굴을 바라보며 까꿍까꿍 거렸다. "참말로 똑똑하게 생겼어. 너무 똑똑하게 생겨서 지 성을 올라 타겄는 걸?" "지, 성 누구?" 철용네의 말에 해룡네가 뜬금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뉘긴 뉘여. 반굉일마다 집에 오는 승철이 있잖여." 철용네는 해룡네를 바라보지 않고 승우의 모자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혀로 맹꽁이가 우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승우가 방긋 웃는다. 웃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손가락으로 볼을 살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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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수
2009.09.20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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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는 끝이 났다. 축제가 끝난 광장에 남는 것은 철거를 하지 않은 애드벌룬과 야시장부스 들 뿐이다. 축제의 마지막 팡파르를 울렸던 불꽃놀이는 흔적도 없는데 광장에는 온갖 쓰레기가 축축하게 이슬에 젖어있다. 쓰레기만 노숙을 한 것은 아니다. 지난 밤 '추풍령 가요제'에 구경을 왔던 칠순 노인의 쓸쓸한 비애도 공설운동장의 무대 앞에서 실망감을 품에 안고 노숙을 했다. 원론으로 돌아가 보자. 축제의 본질은 무엇이고, 축제를 개최하는 목적은 무엇이며, 축제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은 얼마인가 하는 탁상공론적인 문제는 접어 두고 '추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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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수
2009.09.1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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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를 흝어 낸 짚단 중에 좋은 것은 지붕에 이엉을 하고, 새끼나 꼬거나 가마니를 짜는데 사용할 목적으로 헛간에 잘 쟁여 놓는다. 또는 소 먹이나 외양간에 깔아준다. 소에 밟혀서 소똥과 뒤섞인 거름은 다시 논에 뿌려져서 새로 자라나는 모의 영양분이 된다. 곧 벼를 심고 수확을 한다는 것은 일종의 윤회輪回와 같은 것이다. 논에는 벼가 자라고 있어야 한다. 벼가 자라고 있을 때는 비록 타작을 하고 나면 빈쭉정이 만 남을 망정, 저 놈을 수확해서 이리저리 궁리를 하면 올 겨울은 먹고 살 수 있을 테지. 하는 희망에 먹지 않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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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수
2009.09.17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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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농사는 겨울 동안 얼었던 계곡의 물이 풀리고 버들가지에 푸릇한 새싹이 돋아나면 시작이 된다. 먼저 모판을 만들어야 하는데 풀을 베고 나뭇잎을 긁어모아서 논에 넣고 자근자근 밟아서 상판을 만든다. 그 위에는 겨울 동안 아궁이에서 긁어내어 뒷간 구석에 모아 두었던 재를 뿌리고 못자리 흙이 말랑말랑해 지도록 물을 빼고 햇볕에 말린다. 햇볕을 받아서 따뜻한 흙에 미리 물에 담가 싹을 튀어 놓았던 볍씨를 뿌리고 물을 가두는 것으로 파종은 끝난다. 파종이 끝났다고 해서 모가 될 때까지 마냥 노는 것은 아니다. 못자리를 관리하는 틈틈이 밑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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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수
2009.09.16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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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어무니가 면사무소에 찾아 오셨잖여. 거기서 하시는 말씀이 당신이 아를 벴다고 하시든데, 역부러 면사무소까지 오셔서 그냥 해 보는 소리가 아닌 거 같아서 하는 말이잖여. 대체 그기 말이나 되는 짓이여?" "당신 말 참 잘했슈. 당신은 체민이라는 것이 있고, 당신 말대로 배울만큼 배웠다는 지는 체민도 자존심도 읎는 여잔줄 아셨어유?" 옥천댁은 이동하가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는 점에 안심을 하면서도 너무 서운하고 분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체민을 아는 여자가 그 나이에 아를 베?" "아를 베고 안 베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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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수
2009.09.15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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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댁은 시어머니에 대한 죄스러움과 야속한 남편에 대한 원망이 겹쳐서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억지로 이불을 개 장롱에 넣었다. "여하간 몸조심해야 한다. 니 태몽하고 꼬막네 말대로 손자를 낳는다믄 승철이 문제는 새로 생각해 볼 문젱께." 보은댁은 옥천댁의 두 손을 잡고 밖의 동정을 살폈다. 목소리를 낮추고 옥천댁만 들으라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머님, 그기 무슨 말씀이셔유? 승철이는 지 배가 아파서 낳은 아들은 아니지만 지가 밤 잠 안자며 키운 맘으로 낳은 자식유. 설령 이븐에 아들을 낳는다고 해도 그 아는 승철이 동생유. 그
한만수의 대하 장편소설 금강
한만수
2009.09.14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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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는 여전히 마당을 뚫어 버릴 것처럼 소나기가 내리꽂히고 있었다. 옷을 입는 소리와 함께 컴컴한 구석에서 나지막하게 들려오던 박태수의 목소리가 가슴을 두들기는 것을 느꼈을 때서야 자신이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는 걸 알았다. 기억은 징검다리처럼 그 시점에서 또 끊어졌다. 기억이 이어지는 부분에는 그날 밤 황소가 집으로 들어오는 꿈이었다. 그려, 나야 하늘 아래 둘도 읎는 죄인이라 하지만. 이 아이는 먼 죄가 있겄어. 내 운명이 이 아이를 위해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일. 워틱하든 낳는 수벢에 읎겄지.
한만수의 대하 장편소설 금강
한만수
2009.09.13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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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두 살의 옥천댁이다. 성적으로 한참 민감한 나이에 임신한 암소를 바라보며 남편과 합궁. 그것도 미완으로 끝난 합궁을 생각하는 사이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슴이 울렁거리며 온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암 걱정 말고 핀히 주무셔유. 지가 한숨도 안자고 지킬딩께." 옥천댁은 언제 등 뒤에 박태수가 와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박태수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뒷걸음을 쳤다. 양력으로는 9월이지만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계절이다. 하지만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한만수의 대하 장편소설 금강
한만수
2009.09.1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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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을 임신했을 때도 똑같이 입덧을 했었고, 출산을 할 때는 똑같이 생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겪었다. 그런데도 딸들의 잠지를 만져 보았을 때는 이처럼 가슴에서 넘쳐흐르는 전율을 느껴 보지 못했다는 것이 견딜 수 없는 미안함과 죄스러움으로 살아났기 때문이다. 문을 가린 이불호청 밖으로 해가 뜬지 오래 된 것 같은데도 밖은 괴이하리만큼 조용하다. 뒤안 감나무에는 오늘은 콩새들이, 까치들이 앉지 않기로 작정을 했는지 새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문 밖이 너무나 조용해서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꿈속에서 아이를 낳은 것은
한만수의 대하 장편소설 금강
한만수
2009.09.09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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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은 어제 저녁부터 서너 시간 간격으로 장작불을 넣어서 방바닥은 후끈후끈 거린다. 게다가 행여 바늘만한 바람이라도 들어 올까봐 창문이며 방문에 이불호청을 걸어 놓아서 가만히 있어도 얼굴이며 목에 땀방울이 맺힐 정도다. 보은댁은 옥천댁에게 가문의 대를 이어갈 손자가 태어난 올해가 쥐때 해이며, 난 시가 밤 2시 15분이라고 정확하게 분까지 알려주었다. 더불어 쥐가 한참 왕성하게 활동할 시간에 태어나서 장차 큰 갑부가 될 것이라고 덕담을 해 주었다. 옥천댁은 딸을 셋 낳을 동안 한 번도 해 주지 않던 보은댁의 덕담이 반갑기 보다는 가
한만수의 대하 장편소설 금강
한만수
2009.09.08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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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두 번째로 드릴 말씀은 이븐에 우리 동리에 비료가 열 포 배당이 됐슈. 생각 같아서는 집집마다 한 포씩 나눠 주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열 포 벢에 안돼서 부득이, 비료대 미수가 읎는 집 부텀 배당을 해 주고 나서 여분이 있으믄 다른 이들도 생각을 해 줄 모냥잉께. 비료가 필요한 분들은 오늘 아침을 먹는 즉시 저희 집으로 왕림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번 째로는 식전부텀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머 하지만 어제 면사무소에서 있었던 구장단 호의 결과를 말씀 드리겠슈. 다름이 아니라 면사무소 별관 신축 공사를 명
한만수의 대하 장편소설 금강
한만수
2009.09.07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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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평래는 변쌍출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말없이 주머니에서 쌈지를 꺼냈다. 손바닥 길이만한 곰방대에 담배를 눌러 담아서 불을 붙인다. 담배 연기를 코로 길게 내 뿜으며 이병호의 집 대문을 지그시 응시한다. "암만해도 우리들 보다는 맘이 틀리겄쥬. 우리들이야 그저 맘 한 구석이 짠 할 정도겄지만, 태수 아부지야 면장님하고 여간 가찹게 지냈슈? 섭섭하기로 치자믄 맘이 터져 나가겄쥬, 머." "구장은 말이라도 그릏게 하는 거이 아녀. 솔직히 난 아들을 낳고 딸을 낳는 것은 순전히 하늘의 뜻이라고 봐." "여기서
한만수의 대하 장편소설 금강
한만수
2009.09.06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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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븐에는 틀림읎는 아들인 줄 알았는데……" 날망집은 자식 자랑을 하는 표정을 짓는 청산댁의 말을 무시해 버리고 말머리를 돌렸다. 서울에서 무얼해 먹고 사는지 소식도 없는 아들 형제들의 얼굴이 울컥 떠 올라서였다. "학산 꼬막네도 장담을 했다고 하잖유. 이번에 만약 또 납작한 걸 낳게 되믄 손바닥에 장을 지진다고 말여유." "면장님 승질에 눈 딱 감고 계시지는 않을 터고 꼬막네 불러다 작살을 내겄구먼." "옛날 같았으믄이야 사기죄로 주재소에 찔러도 백 번은 찔렀겠지. 하지만 세상
한만수의 대하 장편소설 금강
한만수
2009.09.03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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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안개는 들불처럼 들판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는 이른 아침이다. 오늘은 다른 날과 다르게 둥구나무 밑이 조용하기만 했다. 둥구나무 밑에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삼삼오오로 둘러서 있다. 몇몇의 남정네들은 너럭바위에 앉아 있는 순배영감과 변쌍출을 중심으로 빙 둘러서서 이병호의 집 대문을 가끔 쳐다본다. 이른 아침인데다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아서 이병호의 집 대문은 보이지만 거리가 멀어서 대문에 쳐 놓은 금줄은 보이지 않았다. 왼새끼로 꼬아서 거친 금줄에는 분명히 빨간색 고추가 꽂혀있지 않았다. 대신 계집애를 상징하는 생솔가지와
한만수의 대하 장편소설 금강
한만수
2009.09.02 18: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