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도 언덕이 있어야 등을 기댄다고 한다. 사람 역시 기댈 언덕을 찾게 마련이다. 살림살이를 꾸려 가야 하는 까닭이다. 권력을 유일한 언덕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고 출세를 언덕으로 믿는 사람도 있지만 돈이면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장담하고 돈을 절대의 언덕으로 현대인들은 확신한다. 그러나 사랑함을 언덕으로 여기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만나기 어렵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모습은 서글픈 것이다. 그리고 보면 사람은 별로 변한 것이 없는 셈이다. 사랑의 언덕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모르는 탓도 있다. 허나
도마뱀이 위기에 당하면 꼬리를 잘라주고 도망을 친다. 청개구리가 뱀을 만나면 죽은 시늉을 하면서 가만히 있다. 그리고 까투리 새끼들이 하늘을 빙빙 도는 수리가 있으면 발랑 나자빠져 배의 솜털을 바람에 날리게 하여 마른 풀처럼 보이게 한다. 이렇게들 하여 목숨을 부지하려고 꾀를 부린다. 그러나 이러한 꾀부림은 속임수의 잔꾀가 아닐 것이다.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방법인 까닭이다. 도마뱀은 도마뱀을 속이지 않고 청개구리는 청개구리를 속이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을 해칠 수 있는 다른 것에만 속임수를 써서 살아남는 꾀를 부릴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길을 가든 서울만 가면 그만이지 않느냐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러나 목적이나 목표가 있으면 무슨 수단이든 모조리 동원해서 그것들을 달성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사람을 무서운 사냥꾼으로 몰아 버린다. 한 때 하면 된다는 구호가 판을 친 적이 있었다. 일부터 벌여 놓고 해가면서 그때 그때 메방을 치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을 해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죽을 끓이는 일과 밥을 짓는 일은 다른 법이다. 쌀죽을 끓이자면 물이 많아야 하고 쌀밥을 짓자면 물이 적어야 한다. 이처럼 하는 일에는 저마다 다른 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
숲속에 가면 무수한 새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새들은 노래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는 것일까? 듣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새소리는 노래로 들리기도 하고 울음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새 소리는 기쁜 마음에는 노래로 될 것이지만 슬픈 마음에는 울음으로 맺혀 올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소리지만 사람은 마음에 따라 다르게 듣는다. 이는 사람의 감정 때문이다. 배고픈 사람은 한 그릇의 밥을 원하고 목마른 사람은 한 대접의 물을 원한다. 밥을 먹으면 배고픔은 없어지고 물을 마시면 목마름이 가신다. 괴로운 배고픔은 한 그릇 밥으로 가셔져 유
옛날과 달라진 게 하도 많아 / 어떤 땐, 지난 일들에 발 묶여 서성거리지만 /오늘은 '스승의 날'이 부끄러워 /죄없는 죄인처럼 출근을 머뭇거린 바보가 됩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또 어떤 걸음으로 분주해 하는지.......'/ 어둔 밤 지나야 새벽 오듯 / 사도 행보마다 찍힌 떨림의 편린들 /백년 향한 새살 됐음 좋으련만. /쓰러질지언정 가녀린 신음 한 번 엄두도 못낸 채 /스스로 낮춘 눈빛으로 하나를 더 가르치려 돋구던 목청 /툭하면 터지고 깨지는 아이일수록 /학용품 몇 점 사서 슬그머니 가방에 넣어 준 손길 /당
약속을 잘하는 사람은 약속한 것을 잊어먹기가 쉽다. 너무나 많은 약속을 해서 무슨 약속을 했는지 감을 잡을 수 없는 까닭이다.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잊어버린다면 지켜질 수 없다. 그리고 약속을 잘하는 버릇으로 그는 허풍선이가 되어 버리고 만다. 허풍선이가 되면 참말을 해도 거짓말로 들어주므로 참말을 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면 사람은 저절로 신용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허풍선이의 말로는 결국 거짓말쟁이로 떨어진다.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은 좀처럼 약속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할 수 있는 일이면 어렵사리 약속을 하고 할 수 없는 일이
사람이 사는 데는 알아야할 것이 있고 몰라야할 것이 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배울수록 삶을 살찌게 하지만 서로 미워하는 것은 배울수록 삶을 아프게 한다. 빵을 구워서 먹으라고 주는 사람과 총을 만들어 쏘라고 주는 사람은 그 마음이 서로 같을 리가 없다. 물론 총을 주면서 선한 사람을 보호하고 악한 사람을 징벌하라고 충고를 하면서 준다고 하더라도 이미 총을 간직한 사람은 해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까닭이다. 이처럼 선한 것은 알수록 좋지만 악한 것은 모를수록 좋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선악이 함께 있으므로 언제나 이단(異端)이란 문제가
말이 앞서고 뒤가 흐린 사람은 말이 헤프다는 뒷말을 듣는다. 할 수 없는 일을 약속하는 사람은 허풍쟁이로 따돌림을 당한다.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은 덕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상에서 불쌍한 인간은 누구인가? 돼먹지 못한 인간이라고 욕을 먹는 사람일 것이다. 이러한 욕은 덕이 없는 데서 비롯된다. 그래서 무언가 잘못되어 불편한 사이가 되면 제가 덕이 부족해서 그러니 이해해 달라고 한다. 권력이 있다고 백성을 업신여기고 돈이 있다고 가난한 사람을 얕보는 인간은 권력이나 돈이 없어지면 천하에 몹쓸 인간으로 낙인이 찍혀
어른은 어린이의 맑은 두 눈을 보면 부끄러워진다. 사람의 마음이 맑으면 눈도 맑다는 말이 떠오르는 까닭이다. 마음이 맑다는 것은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이다. 부끄러움이 없는 삶보다 더 귀한 인생의 선물은 없다. 그러나 어느 사람이나 부끄러움을 안고 산다. 살다보면 못 할 짓을 범하고 몹쓸 마음을 부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믿음을 의심으로 갚아 마음이 아프고 부끄러운 경우도 있고 사랑을 미움으로 갚는 어리석음도 범하며 약속을 어기고 변명을 하는 얌체 짓을 범해 수치를 둘러쓰는 경우도 있게 마련이다. 왜 이렇게 인간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옛날에는 삼대가 한 집안에서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가족을 만나기가 힘들다. 지금은 핵가족 사회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핵가족은 윗사람을 모시는 삶을 면하게 해주기 때문에 현대인은 이를 좋아하고 부모 모시는 것을 사무적으로 처리 하려고 한다. 이런 까닭에 부모가 자녀를 사랑함은 아직 금이 가고 있지는 않으나 자녀가 부모를 사랑함은 위기를 맞고 있다.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낳아주고 길러준 은혜를 자녀는 효도로 갚아야 한다. 이는 변할 수 없는 삶의 질서이다. 이러한 질서를 天倫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군자는 낡은 인간상이니 이제는 엘리트라고 해야 새로운 인간형일까? 아니다. 양반과 상것이 차별이 추상같이 엄격했을 때 율곡은 첩의 소생이나 상것에게도 나라를 위하여 봉사하는 기회를 주고 양반이 되는 기회를 주자고 했다. 그러자 공맹을 앞세웠던 무리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반대를 했었다. 이 문제를 놓고 보면 율곡은 트인 사람이었고 반대했던 무리들은 꽉 막혔던 사람들이다. 조선이 왜 망했던가? 양반과 상놈으로 나누는 잔인한 신분사회의 구조 탓으로 망했던 것이 아닌가. 율곡은 분명 선조 임금시대에 보기 드문 선각자였던 셈이다. 선각자는 앞
사람이 사람의 대접을 받으려면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못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고 한다. 엇나가고 빗나간 사람은 어디서나 손가락질을 당하게 마련이다. 사람으로부터 배척을 당하는 사람은 사람이면서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깨우친다면 그보다 더 나은 배움은 없는 것이다. 남을 아껴주고 도와주면서 격려할 수 있는 마음은 남을 시기하고 해치면서 모함하는 마음을 멀리하게 마련이다. 남이 잘 되면 배가 아프고 남이 못되면 미소를 짓는 인간은 인간의 탈을 썼을 뿐 인간이 아니다. 천하에 못난 놈은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치일
필자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는 봄 소풍을 갈 때마다 비가 내렸다. 아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지만 누군가에 의해 그렇다고 말이 전해와 모두들 그렇게 믿게 되었다. 학교를 지을 때 아주 커다란 구렁이가 나왔는데 그 구렁이를 죽었기에 죽은 구렁이의 저주로 비를 내리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는 비일비재하여 이웃 학교마다 거의 같았다. 소풍날 비가 내린 것은 우연의 일치였을 것이다. 학교마다 봄 소풍 시기가 비가 내릴 때쯤에 가는 결과였을 것이다. 청와대의 주인은 좋던 싫던 우리의 대표임은 확실하다. 청와대의 주인인 대통령이 잘 되길
겉치레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공경심 앞에 누가 머리를 숙이지 않을 것인가. 서로 헐뜯고 험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고 오순도순 살아야 한다는 화합을 누가 싫어할 것인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아주 달리 세상이 전개되면서 서로를 공경하기 보다는 서로를 시샘하고 서로 화합하기 보다는 서로 경계하면서 시위에 올려놓은 화살처럼 긴장을 하며 인간들은 살아간다. 이러한 삶의 비극은 결국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 내가 나만을 사랑하고 남을 사랑할 줄을 잊어버린 탓이며 나와 남이 서로 하나로 묶인 우리라는 생각보다 서로 이해
산천을 따라 물을 타고 떠내려 온 진달래가 시냇물에 이르러 누렇게 떠서 떠 있는 장미꽃을 만났다. 진달래가 왜 물을 따라 마음 편히 떠나지 않고 이렇게 멀뚱멀뚱 머뭇거리느냐고 장미에게 물었다. 그러나 장미는 울상을 하면서 어디를 갈지를 몰라 이렇게 맴만 돈다고 서글퍼했다. 그 말을 들은 진달래가 물속이든 바람속이든 결국 흙으로 가서 제 뿌리를 찾아가면 되지 않느냐고 장미에게 의아해 물었다. 진달래의 말을 들은 장미는 꽃병에 꽂혔다가 버려진 꽃의 설움을 몰라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며 산천의 물을 타고 떠내려 온 진달래를 부러워했다.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아무개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자면 사람이 제일 문제라면서 맡길 사람을 찾을 때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려고 한다. 물론 오늘날에는 인품에 앞서 그 사람의 능력을 먼저 따지려는 풍조가 앞서고 있다. 이러한 풍조에 너무 매달리다 보면 뒤끝이 별로 신통찮게 끝나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사람의 인품과 능력은 서로 다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능력은 재주에서 비롯되고 인품은 덕에서 비롯되는 까닭이다.덕(德)은 베푸는 마음을 앞세우지만 능력은 요구하는 마음
할아버지의 눈에는 어린 손자가 예쁘게만 보인다. 잘못을 저질러도 그냥 예뻐 보이고 울어도 예쁘고 웃어도 예쁠 뿐이다. 그래서 어린 손자는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서 오줌을 싸도 할아버지를 기쁘게 한다. 하는 일마다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어린 손자는 그 자체가 할아버지에게 성실함 그것이고 믿음 그것이다. 손자 돌보는 재미로 여생을 산다고 자랑하는 늙은이들이 옛날에는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할아버지가 흔하지 않다. 삼대가 한 지붕 밑에서 사는 경우가 흔치 않은 까닭이다.대여섯 살 무렵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초등학교에 가는
한 그루의 나무를 빌려서도 사람을 살필 수가 있다. 나무의 삶은 잎을 피우고 꽃을 틔워 열매를 맺는다. 나무는 이를 위하여 철따라 해야 할 일을 어김없이 한다. 다만 나무는 이러한 삶을 해마다 되풀이 하지만 사람은 해마다 새롭게 하려는 욕망을 갖는 것이 다를 뿐이다. 못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고 한다. 그런 송아지 같은 사람은 어디를 가나 화를 만들고 남을 해치게 마련이다. 이러한 사람은 덜된 사람이고 모자란 사람이다. 나이만 먹고 철없는 인간을 싹이 노랗다고 한다. 나무로 치면 잎 구실을 못할 이파리에 불과함을 말함이다. 제구실
천하에 몹쓸 놈은 아마도 어린애를 훔쳐다 미끼로 삼아 돈을 뜯어내려 덤비는 유괴범일 것이다. 유괴범은 죄 없는 어린이를 끌고 가서 숨겨놓고 그 아이의 부모에게 돈을 뜯어낸다. 아이를 볼모로 잡힌 부모는 어떠한 요구라도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 놈들은 알고 행패를 부리는 것이다. 대서양 횡단을 비행기로 맨 처음 했던 린드버그에게 외아들이 있었다. 횡단 비행에 성공하자 린드버그 집안에는 명성과 부가 한꺼번에 쌓이게 되었다. 그러자 유괴범들은 그 외아들을 미끼로 엄청난 돈을 뜯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린드버그 부부가 찾아낸 아이는
남이야 어떻든 나만 편하면 된다는 사람은 예의라는 것을 아예 떠난 놈이다. 이렇게 큰소리를 친 한 할아범이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 자리에 편안히 앉아있는 젊은이의 귀에 들어가라고 아마도 그런 말을 외쳤던 모양이다. 그러자 쑥스러워진 젊은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섰다. 큰소리를 쳤던 할아범이 그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이 경우 두 사람은 다 예(禮)를 멀리한 꼴이 되고 말았다. 노인은 그것을 강요했으니 예가 아니고 젊은이는 진심이 깃들지 않은 공손을 억지로 마지못해 베풀었으니 헛수고를 한 까닭이다. 예의(禮儀)는 사람과 사람사이를 고마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