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수필가

 

[이향숙 수필가] 책을 읽는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내었다. 어쭙잖지만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죄책감마저 들었다. 문우와 선배님들이 자식 같은 책을 내어 주었을 때도 감사히 받아 들었지만 어지러움에 이내 덮어야 했다. 소장하고픈 욕심에 서점에서 예약까지 하며 모셔 온 책들도 유배지에 갇히듯 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동안 비 오는 날 창문에 빗물이 흐르는 것처럼 사물이 보일 때가 있었고 안개가 자욱한 아침을 맞이하는 것처럼 불투명하게 보여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마침 안경을 바꾸게 된 아들을 따라 나선 김에 나도 검사를 해보았다. 시력은 좋으나 가까이 있는 것이 잘 보이지 않는 노안이라 하며 다초점렌즈를 추천한다. 눈에 대어보니 아래쪽은 가까이 있는 글씨가 잘 보이는 돋보기이 이고 위쪽은 멀리 있는 사물이 편안하게 보여 그것으로 선택했다. 한동안 아래와 위를 번갈아 보며 익숙해질 때까지 연습을 해야 한다.

어린 시절 안경을 착용한 친구들은 손에 꼽을 만큼 몇 안 되었다. 나도 쓰고 싶었지만 시력이 좋아서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멋으로 안경테만이라도 걸쳐보고 싶었다. 요즘은 패션의 일부이지만 그 시절에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미술시간에 친구의 얼굴을 그려 판화로 찍어냈었다. 내 얼굴이라 여기고 안경을 그려 주었다. 그 후로도 시력이 별반 변함이 없던 탓에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지천명을 넘기면서 책 읽기가 부담스러워 안경을 쓸 나이가 되었나 싶은데 아직도 시력은 건재 하단다. 다만 노안으로 가까이 있는 사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이제야 마련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내세울 것이 그리 많지 않은 내게 밝은 눈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마음에도 안경을 쓰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사람의 속내까지 읽을 수 있는 안경은 없다. 겉으로 다 표현되지 못하는 따듯한 마음의 온기도 느낄 수 있을뿐더러 이중적인, 어쩌면 다중적인 인격체가 투시되어 벗을 사귐에 있어 실패하고 싶지 않다면 그것은 욕심이다. 신선함을 잃은 관계를 오래도록 유지하며 진정한 친구로 거듭날 수 있도록 상대의 마음이 보이면 보지 말아야 될 것들조차 확대될 것이다.

그가 그저 인간일 수밖에 없는 것을 인정하고 나 또한 그러 하거늘 그럼에도 매번 욕심을 갖게 된다. 시원한 바람 속에 숨은 미세먼지조차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축복이기만 할까. 어쩌면 공포로 다가오리라. 그러고 보니 나는 누군가에게 내면까지 진실하였는가. 스스로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적당히 듣고, 보며, 말하라는 신의 뜻이 아닐까 한다. 걸러 낼 것을 걸러 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본인이 행복하고 세상 또한 평화로울 것이다. 육안뿐만 아니라 마음의 창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맑았으면 좋겠지만 그것을 가슴에 담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이번에 마련한 안경을 통해 까만 점들이 선명한 글자로 읽혀진다. 책의 페이지 위에 행간마다 노니는 이야기를 맘껏 읽어 내려간다. 서두르지 않고 에레미를 겹쳐 살포시 얹어 놓고 아래로 내려오는 의미를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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