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병덕(權秉悳·1868년 4월 25일~1943년 7월 13일)

 

"나는 차라리 계림의 개와 돼지가 될지언정 일본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권병덕 선생이 출간하려 한 '조선총사(朝鮮總史)' 중>

[충청일보 배명식기자 ] 충북 청주군 미원면 성화동(현 충북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종암리) 출신으로 손병희를 보좌해 천도교의 주요 직책을 수행했으며 3·1운동 이후 천도교 민족운동을 주도했다. 

1885년 권병덕은 임규호(任奎鎬, 任弓鎬)로부터 난세를 구제하기 위해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입도할 것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했다.

이후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읽고 평등한 사회로의 개벽을 주장하는 동학의 교의에 공감해 4월 27일 임규호의 추천을 받아 입교했다. 

입교 직후인 1886년 2월, 권병덕은 경북 상주군 화서면 전성촌으로 가서 동학의 2세 교주인 최시형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질병이 만연하던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포교를 벌여 200여 명의 교인을 갖게 됐고 청주접주로 임명됐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1894년 9월 말 최시형의 명을 받아 관하 도인을 이끌고 기포했다. 1894년 10월 그는 충경포(忠慶包)와 문청포(文淸包) 도인 3만여 명을 이끌고 충북 보은에 갔다.

중군 통령(統領)인 손병희의 휘하에서 후군(後軍)을 책임졌다. 

권병덕은 보은에서 출진하여 옥천군 청산에 가려다가 관군 300여 명의 공격을 받고 큰 희생을 치렀다.

청주진위대 병정과 경병(京兵)의 공격을 받고 연전연패했고 충남 내포 등지로 도망을 다녀야 했다. 

1896년부터 최시형이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는 1898년까지 강원도 원주 등지에서 김연국과 함께 최시형을 보필했다. 

하였다. 그리고 최시형의 구원 활동을 벌였다.

1898년 6월 최시형 사후에 권병덕은 김연국(金演局)을 보필하며 도망을 다니면서 교인을 단속하는 활동을 하였다. 

1906년 1월 권병덕은 김연국, 김낙철(金洛喆), 원용일(元容馹)과 함께 단발을 하고 손병희를 찾아가 천도교에 동참했다. 

1907년 12월 갈등으로 천교도를 나와 시천교(侍天敎)로 갔다가 1916년 30여 지도자 및 그 소속 교인과 함께 다시 천도교로 돌아왔다. 

1919년 2월 21일 손병희의 집에서 손병희로부터 "이번에 조선독립선언을 하므로 여기에 가맹하라"는 제의를 받고 흔쾌히 승낙했다. 

3월 1일 독립선언식을 행하고 체포돼 서대문감옥에 수감됐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 산입)의 형을 받았다.

경성감옥으로 옮겨져 1년 5일간의 그물을 짜는 징역을 행하며 옥고를 치렀다.

출소 이후 천도교 혁신운동과 함께 우리의 역사에 관한 내용을 기고하거나 책을 내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했다. 1943년 7월 13일 자택에서 향년 76세로 별세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