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신홍식 (申洪植·1872년 3월 1일~1939년 3월 18일)

 

청주 출생… 감리교 목사이자
민족운동가로 3·1 독립선언식
수감 후에도 다양한 사회활동

"일본 정부의 참혹한 비인도적 태도와 총독정치의 압박과 핍박이 시시각각으로 더 고통을 주어 견디지 못하게 절박하게 됨으로써 거저 있지를 못함에 이르렀소. 그에 따라서 조선독립의 사상이 날로 더 가슴에 부글부글 끓게 되었소."
  <신홍식 선생의 신문조서 중(1919년 3월)>

감리교 목사이자 민족운동가인 동오 신홍식은 일제의 억압에 신음하는 국민들에게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위로'와 '희망'을 전했던 목회자이자 3·1운동 민족대표로 민족의 고난에 직접 참여해 민족과 함께 했던 인물이다.

출생지는 가덕면 인차리로 알려져 있으나 제적등본상 출생지는 청주군 문의면 문산리로 돼 있으며 일제의 신문에 문의군 동면 대일리로 진술한 바 있다.

1904년부터 자생교회로 설립된 북감리회 청주읍교회에 출석한 그는 입교한지 2년만인 1906년 북감리회 서원보 선교사에게 발탁돼 세례를 받고 보은에 파송, 목회자를 시작했다.

1913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로 공주에서 포교활동을 했다. 1915년 장로목사 안수를 받고 공주읍교회로 파송됐다. 1917년 평양의 남산현교회로 파송돼 시무했고 이후 독립운동에 합류했다.

1919년 2월 15일 손정도(孫貞道) 목사를 통해 평양 기홀병원에 입원해 있던 이승훈(李昇薰)과 만나 "지금 경성에서는 천도교를 중심으로 조선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발표할 계획을 하여 우리도 같이 하기로 하였다"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자신도 독립운동에 참가하겠다는 뜻을 이승훈에게 표명했다.

2월 19일쯤 서울로 내려와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학생부 간사였던 박희도(朴熙道)를 만나 국권회복을 위한 조선독립계획을 밝힌다. 이것은 서울과 평양에서 따로 진행되던 기독교계의 독립운동이 결합하는 계기가 됐다.

3월 1일 독립선언식 후 다른 민족대표와 함께 체포, 연행됐다.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수감생활을 하다가 1921년 11월 만기 출옥했다.

선생은 출옥 이후에도 3·1운동만큼의 큰 흔적은 아니었으나 절제운동과 청년운동, 농촌운동 등 지속적이면서도 다양한 사회방면에서 다양한 사회활동의 궤적을 남겼다.

목회 현장에서 은퇴 후 청주로 낙향 1939년 3월 18일 그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잘 믿고 충성하며 민족의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남기고 일생을 마쳤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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