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권동진 (權東鎭·1861년 12월 15일~1947년 3월 9일)

괴산 출생 … 日서 손병희 만난 후 
천도교 입교 핵심인물로 부상
해방 이후 독립국가 수립 '온 힘' 

[충청일보 배명식기자] 무인 가문에서 출생하여 군인의 길을 걷던 선생은 일본에서 손병희를 만난 후 천도교에 입교해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1운동을 주도했다. 

일제의 신문조서에서 서울 정동이 출생지라 진술했으나 손자(권혁방)의 증언에 따르면 충북 괴산군 소수면 아성리 안심마을에서 태어났다. 

무인 집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1869년 무렵 서울 재동으로 이사한 뒤 1880년쯤 하도감(下都監)에서 일본군 장교를 초빙해 사관학교를 개설할 때 제1기생으로 입학했다. 1기생은 108명이었는데 1882년 봄 졸업한 10명 중 수석을 차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95년 을미사변 당시 일본 낭인들의 명성황후 시해 음모와는 관계없이 명성황후를 폐위하려는 대원군의 '명성황후 폐위' 획책에 가담했다가 거사 실패로 일본 망명길에 올랐다. 1900년 망명 중 오사카에서 손병희를 만나 천도교에 입교했다. 1904년 손병희·이용구 등 동학지도자들과 함께 진보회를 조직하고 동학 포교와 정부개혁을 주장한 '갑진개화운동'을 주도했다. 

1906년 1월 5일 손병희 등과 함께 국내로 돌아와 손병희를 보좌하며 도집(都執), 도사(道師)를 맡았고 전제관장, 포덕 주임 등을 역임하며 천도교의 핵심인물로 부상했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 병탄하자 망명 대신 국내에 남아 천도교를 통해 대중과 함께 호흡하며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했다. 

1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세계가 개조되는 상황에서 민족독립의 기회를 포착, 1918년 12월 오세창, 최린 등과 뜻을 모아 기독교세력과 연합, 국외 민족운동세력과 연결하는 전민족적 틀에서 만세운동을 추진해 나갔다. 3월 1일 독립선언식 거행 후 일제 경찰에 붙잡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12월 22일 출옥했다.

1922년 5월 손병희가 세상을 떠나면서 구심점을 잃은 채 신·구 분열에 휩싸인 천도교를 구파의 지도자로 이끌었다. 사회주의 세력과 연대해 6·10만세운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돼 무산됐다. 

6·10만세운동은 정치, 사회 사상의 이념을 초월한 민족운동으로 국외에선 민족유일당운동으로 번져 나갔고 국내에서는 신간회 운동으로 나타났다. 신간회 창립에 적극 참가했던 선생은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민중대회 개최를 추진하고 대회 당일인 12월 13일 연설을 담당할 예정이었다. 일제의 사전 탄압으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돼 징역 1년형을 받아 고초를 치러야 했다.

해방 이후 84세의 나이에도 독립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임시정부환영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국가 건설에 힘을 기울였고 1945년 12월 신탁통치 소식이 전해지자 신탁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해 독립국가 수립에 온 힘을 쏟았다. 해방정국의 혼란이 가중되던 1947년 3월 9일 87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