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애 충북도의원

 

[송미애 충북도의원] 며칠 전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에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 개토제(開土祭)가 열렸다. 지난 2018년 5월부터 8월까지 충북도의회 행정문화위원회는 의정학술연구용역으로 '한국전쟁기 충북지역 민간인 희생자 실태조사'를 했다. 이 내용을 충북도와 공유한 결과 광역 지자체에서는 최초로 희생자 유해 발굴 사업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충북역사문화연대 박만순 대표는 한국전쟁기 군경에 의해 희생된 충북 민간인 수가 7300명이 넘는다고 밝혔다. 도내에서도 희생자 매장지가 적지 않다고 한다. 때문에 충북도는 유해발굴사업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과 추진의지를 가져야 할 것이다. 6·25 전쟁 당시 정부는 전선이 밀리자 좌익 활동의 진위파악과 재판도 없이 민간인을 학살했다. 무능한 정권은 민간인이 북에 동조할까봐 지레 겁을 먹고 무차별 학살 후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했던 것이다.

개토제가 열린 보은 아곡리도 민간인을 학살했던 곳 중의 하나다. 한국전쟁 당시 청주에 거주했던 민간인 150여 명을 끌고 와 무참히 학살 후 암매장 한 것이다. 희생된 분들도 억울하겠지만 오랜 시간 슬픈 기억을 품고 살았을 유가족들의 상처와 아픔은 어찌할 것인가. 민간인 희생자 가족들은 지난 70여 년간 부모형제들이 매장된 곳을 찾아 수습할 생각조차 못했다. 빨갱이 자식이라는 그릇된 사회적 분위기에 숨죽여 살아오고 이제 노년이 되었다.

그날 개토제에서 희생자들에게 술을 따라 올리던 유가족 눈가에 눈물이 가득했다. 1950년에 숨진 아버지 나이의 두세 배가 넘는 노년의 아들딸이 되어 부모님 전에 선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부모를 보내고 홀로 세파에 맞서서 견뎌냈던 세월의 조각들이었을 것이다. 어느 일간지에 보은 아곡리에서 희생되었던 분의 가족사진이 실렸다. 흑백사진 속에는 7살 쯤 되어 보이는 단발머리에 무명저고리를 입은 여자애가 있었다. 그 아이는 지금 70세가 넘은 노인이 되어 서울에 산다고 한다.

1950년 여름. 그 아이는 청주 내덕동이나 우암동 아니면 다른 청주 어느 곳에 살았을 것이다. 엄마가 집을 나선 그날 이후, 여름 내내 골목길에서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지 않았을까? 그렇게 지내온 마음은 마당에 봉숭아꽃이 지고, 감이 익고, 눈이 소복하게 쌓이는 시간을 보낸 통한의 아픔이었을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생각하며 아가씨로, 엄마로, 할머니로 인생을 보냈을 통곡의 세월이었다.

어린 시절 친구 엄마를 볼 때나, 시집을 가던 날이나 명절 때 친정엄마를 그리워하며 인생의 마디를 남겼을 할머니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났다. 70대가 될 때까지 그렇게 한을 간직하고 보낸 그 노인의 자녀 또한 그런 엄마를 보며 얼마나 슬퍼했을까? 왜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 이렇게 3대를 죽음과 그로 인한 고통으로 보내야 했을까?

최근 남과 북에는 평화가 논의되고 있다. 누구나 맡겨진 자기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 이념이나 종교는 아무리 숭고해도 사람의 목숨을 가져갈 자격이 없다. 충북도청에서 보은으로 가는 길이나 충북을 넘어 그 어디로 향하는 길은 평화와 미래, 번영을 생각하는 길이어야 한다. 1950년 7월에 있었던 통곡의 길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그것이 과거를 딛고 미래를 열어가는 우리의 책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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