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식 (申奎植·1879년 1월 13일~1922년 9월 25일)

 

'마음이 죽어버린 것보다 더 큰 슬픔이 없고, 망국(亡國)의 원인은 이 마음이 죽은 탓이다.…우리의 마음이 곧 대한의 혼이다. 다 함께 대한의 혼을 보배로 여겨 소멸되지 않게 하여 먼저 각자 자기의 마음을 구해 죽지 않도록 할 것이다.'-신규식 선생의 명저(名著) '한국혼(韓國魂)'.

[충청일보 배명식기자] 신규식 선생은 중국에서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외교적으로 노력한 숨겨진 주역이며 국력 배양과 민중 계몽 등 자립기반 확충 운동을 총체적으로 전개한 애국자였다.

그는 1879년 1월 13일 충북 문의군(현재 청주시)에서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을 역임한 신용우(申龍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신채호(申采浩) 신백우(申伯雨)와 함께 '산동삼재(山東三才)'라고 불렸다.

17세 때 신학문에 뜻을 세우고 상경, 관립한어학교를 거쳐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무덕(武德)을 쌓았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육군참위(參尉)로서 지방군대와 연계, 대일항전을 계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3도 유생들이 조약 철회를 상소하고 장지연(張志淵)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을 썼다.

민영환(閔泳煥), 조병세(趙秉世), 홍만식(洪萬植) 등은 자결했다.

청년장교 신규식은 솟을대문들을 골라 몽둥이로 후려치며 미친 듯 소리 질렀으나 자신이 한낱 미약한 존재였음을 확인했을 뿐이다.

사흘을 굶고 고민한 결과 민영환 등의 순국은 소극적 행동이 아니라 적극적 투쟁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죽음은 거름의 역할을 하는 것. 내 한 몸 거름이 되어 무수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며 독약을 마셨으나 가족들에 의해 겨우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약 기운이 번진 오른쪽 눈은 시신경을 다쳐 애꾸가 됐다. 

"이 애꾸눈으로 왜놈들을 흘겨보기로 하자. 어찌 나 한 사람만의 상처이겠는가. 우리 민족의 비극적 상징이다"라며 흘겨볼 예,볼 관 '예관'을 자호로 삼아 사용했다. 

▲ 상하이 망명 당시 신채호·신석우·신규식 선생.

이후 선생은 문동학원, 덕남사숙의 설립 또는 지원, 중동(中東)학교장 취임, 공업전습소생들을 중심으로 한 '공업연구회' 조직, 월간 '공업계' 창간, 윤치성 민대식 등 퇴역장교를 규합한 황성광업(廣業)주식회사 설립 운영, 민족종교인 대종교에의 입교, 분원자기공장의 설립과 고려자기 재현운동 등을 했다. 

1910년 경술국치(國恥), 선생은 다시 한 번 자결을 생각했으나 마음을 고쳐먹고 1911년 상하이로 망명, 독립운동의 2대 조류인 외교중심론과 무장투쟁론을 접목시켰다.

중국신해혁명에 외국인으로 참여해 중국국민당정부와의 항일연계투쟁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또 1917년 조소앙(趙素昻), 박용만 등 13명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선포한 '대동단결선언'을 통한 핀란드, 폴란드 등 당시 피압박민족의 독립을 열거하며 우리나라도 통일된 최고기관 즉 정부의 조직 필요성을 역설했다.

또 국내와 일본 등에 동지들을 밀파, 2·8독립선언에 영향을 끼치는 등 3·1운동과 상해임정수립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

▲ 신규식(오른쪽)과 엄주동.

1919년 3·1운동이 벌어지자 선생은 상해에서 프랑스 조계 내에 독립임시사무소를 개설, 정부수립을 추진했다.

상해 임정도 수립됐고 손문 등 중국 광동정부로부터 국가승인도 얻어내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정부수립 후 고질적 파벌의식과 지방색·출세욕 등이 뒤엉켜 1921년 4월 이후 임정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선생은 병원에 누워 의정원 회의 참석을 거부했다.

4월 10일 소위 '재미파(在美派)' 이승만이 내각수반이 됐다.

이듬해까지 병석에 누운 선생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국인들이 단합되지 않는 것을 통탄하면서 25일 동안 불식(不食) 부언(不言) 불약(不藥)을 고집했다.

1922년 9월 25일. 선생은 마지막 남은 숨을 호흡단절법으로 끊고 이승을 버렸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지난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1921년에 신규식 선생이 미국인 콘스탄틴 대위에게 기증했던 태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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