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표 서원대 교수

[이광표 서원대 교수] 1919년 2월 27일 오후 6시경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인쇄소 보성사(普成社). 직원들은 퇴근하고 사장 이종일과 몇만 남았다.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숨을 고른 이 사장은 인쇄기를 돌렸다. 한 장, 두 장…100장…1000장…. 불빛과 기계 소리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을까, 시종 조심스러웠다. 오후 10시, 2만1000장의 인쇄가 끝났다.

그건 독립선언서였다. 최남선이 기초한 이 선언서는 출판사 신문관(新文館)에서 조판을 거친 뒤 인쇄를 위해 보성사로 넘겨졌다. 이들은 인쇄를 마친 독립선언서를 족보(族譜)로 위장해 가까운 이종일의 경운동 자택으로 옮겼다. 인쇄 과정이 순탄할 수는 없었다. 밤늦도록 기계 소리가 멈추지 않자 이를 수상히 여긴 종로경찰서 형사가 인쇄소에 들이닥치기도 했다. 이종일 자택으로 옮기던 도중엔 일경(日警)의 검문을 받기도 했다. 천만다행, 위기를 넘겼고 2만1000장의 독립선언서는 다음날인 28일 경향(京鄕) 각지로 배포됐다.

보성사는 천도교 인사 이종일이 운영하던 인쇄소로, 보성학교와 천도교 불교계의 서적을 주로 인쇄했다. 그 때 보성사는 종로구 수송동 보성학원(보성고보, 보성전문학교) 교정에 있었다. 지금 위치로 보면 조계사 경내다.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지도자들은 기미독립선언서를 서슬 퍼런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인쇄한 것이다. 그 당당함과 의연함이 참으로 놀랍다. 보성사 건물은 그후 일제의 방화로 없어졌으며 보성고보와 보성전문학교도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조계사가 자리 잡았다.

3‧1독립운동 100년. 그 때 그러했듯, 전국 곳곳에서 함성 소리가 들려온다. “대한독립만세!” 무릇 시위가 힘을 얻으려면 구호가 있어야 하고 깃발이 있어야 한다. 함께 부를 노래가 있으면 더욱 좋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바로 선언문이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 차(此)로써 세계만방(世界萬邦)에 고(告)햐야…” 이 독립선언서는 3‧1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고 이념이었고 방향이었다.

서울 조계사 후문 골목 수송공원엔 3‧1독립운동 기념비와 보성사 터 표석, 이종일 동상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 곳은 보성사가 있던 자리가 아니다. 보성사가 있던 자리의 근처일 따름이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는 조계사 내부에 있었다. 정확히는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 회화나무 옆이다. 수송공원과 조계사가 골목 하나 사이에 두고 불과 수십미터 정도 떨어져 있으니 별 것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해도 현재의 보성사 터 표석은 그 위치가 명백히 잘못됐다. 실제 보성사 터에는 표석이 없고 골목 건너 다른 곳에 표석이 서 있는 형국이다. 100년 전 선인들은 목숨 걸고 독립선언서를 짓고 인쇄하고 배포하고 만세를 불렀는데, 100년 후의 우리는 그 인쇄소 표석 하나 정확한 자리에 세우지 못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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