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수필가

 

[이향숙 수필가] 신발장 아래 공간이 있어 자주 신는 신발들을 놓아두었다. 큰아이가 귀대하고 난 뒤 한쪽 귀퉁이를 지키던 아들의 운동화를 빨아둘 요량으로 물을 부었다. 겉보기는 짱짱한데 사방으로 물이 새어져 나온다. 온통 실밥이 터져 어떻게 이런 걸 신고 다녔을까 싶었다. 그래도 유독 아끼던 것이어서 깨끗이 빨았다.

나의 첫 신발은 고무신이었지 싶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까만 고무신을 신고 다니던 모습이 어렴풋하다. 입학식에는 동장군의 기세가 꺾이지 않아 털신을 신었었다. 봄이 되어서야 감색운동화를 만날 수 있었다. 어찌나 신이 나던지 머리맡에 두고 자다가 일어나 몇 번이고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시내에 사는 친구들은 에나멜구두를 신고 왔다.

햇볕에 반짝이는 구두가 움직일 때마다 내 마음도 폴딱거렸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엄마에게 나도 사달라고 했다. 엄마는 십리 길을 발이 아파 구두로는 걸어 다닐 수 없어 안 된다고 하셨다. 이해가 되지 않아 울먹였지만 이내 잊어 버렸다. 감색 운동화가 나름대로 이쁘기도 했고 그나마 닳을까봐 집에서는 고무신을 신었다. 아끼던 운동화가 낡고 작아져서 구겨 신을 때 쯤 내게도 까만 에나멜구두가 생겼다.

추억은 아름다운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에게 이승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출가한 언니들이 친정이 걱정되어 자주 다니러 왔었다. 언제나 씩씩하려 노력은 했으나 풀죽은 모습이 언니들 눈에 보였는지 뒤축이 높은 슬리퍼 한 컬레를 사 주었다.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만 보다가 용기를 내었다. 이불을 쌓아 놓고 기대어 앉은 아버지가 잘 볼 수 있도록 방문을 열고 마루에서 걸어 보았다. '아버지 이쁘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얼굴은 오랜만에 미소가 띄어졌다. 언제 오셨는지 한거리 작은아버지가 내 등을 내리치셨다. "철없는 것."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을 뿐인데 작은아버지는 내 마음이 느껴지지 않았나 보다.

고교시절 몇몇의 남자아이들은 흰색고무신에 까만 유성펜으로 유명브랜드의 상표를 그려 신었었다. 선생님이 신발에 장난치지 말고 운동화를 신고 등교하라 하는데도 한참 가슴에서 용암이 들끓는 시기이어선지 반항기 가득한 모습으로 나타났었다.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물질만능주의를 풍자하는 것으로 비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필리핀의 이멜다 여사에게는 사치의 상징으로, 어느 재벌에게는 근검절약의 표상으로, 현대인에게는 패션의 완성으로 불리 우는 신발이다.

아들의 첫 신발은 내 주먹보다도 작았는데 이제는 항공모함보다 더 크게 느껴진다. 햇볕에 바짝 마르니 보송보송하다. 다음 휴가에 신어보고 마뜩지 않으면 본인이 원하는 것을 직접 마련하라 해야겠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스스로 선택하고 타인에게 본인을 평가 맡기지 말며 그에 연연하지 않는 성숙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생각난 김에 나의 봄나들이 운동화를 아들의 것과 나란히 두었다. 아직은 함께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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