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 (李相卨·1870년 12월 7일~1917년 4월 1일)

▲ 헤이그특사 이준·이상설·이위종.(왼쪽부터)

진천 출신으로 1904년 일제 황무지 개척권 요구 반대 운동 
을사조약 체결 뒤 망명… 항일 민족교육 요람 서전서숙 설립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이위종과 특사로 활동
미국 등에 일제의 한국주권 침해 설명하며 협조요구 
결국 뜻 이루지 못하며 연해주 등서 십삼도의군 편성 
일제 항의로 러시아 추방… 광복 보지 못하고 48세 순국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이상설 선생의 유언

[충청일보 배명식기자] 이상설 선생은 1870년 충북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이행우(李行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동,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총명했기 때문에 7세 때인 1876년 참의를 역임한 동부승지 이용우의 양자가 돼 서울로 올라오게 됐다.

1894년(고종 31년) 25세 때 조선조 마지막 과거(갑오문과)에 급제했으며 1896년 1월 27세의 나이로 성균관 교수 겸 관장이 됐다가 한성사범학교 교관으로 전임됐고 6월에는 탁지부 재무관에 임명됐으나 얼마 안 돼 다시 관직을 사임했다. 

일제가 1904년 5월 '대한방침(對韓方針)'과 '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을 결정했다.

'대한시설강령'은 한국의 농업과 황무지 개간권의 장악을 명시하고 있었다.

선생은 그 해 6월 22일 박승봉과 연명으로 황무지 개척권 요구를 반대하는 하는 상소를 올리고 반대운동을 일으켰다.

선생의 상소가 있은 후 일제의 황무지 점탈을 저지하기 위한 단체로 보안회가 조직돼 활동했으며 '대한매일신보'나 '황성신문' 등 언론에서도 일본의 불법행위를 규탄하게 되자 일제도 황무지 개척권 요구를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05년 11월 17일 이른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회영, 이동녕 등과 의논해 1906년 4월 국외망명을 결정했다. 

선생은 북간도 중에서 한인들이 많이 이주해 사는 연길현 용정촌에 들어가 1906년 8월 항일 근대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설립했다.

숙장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치던 중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수석 특사로 참가하라는 광무황제의 명을 받고 용정을 떠나 연해주로 가게 됐다. 

제2회 만국평화회의는 제정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발의해 각국에 초청장을 보냄으로써 이루어졌는데 러시아 황제는 대한제국 황제에게도 비밀리에 초청장을 보내왔다.

광무황제는 구미 열강의 도움으로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라 여겨 선생을 비롯해 이준, 이위종 등 세 사람을 비밀리에 특사로 임명했다. 

세 특사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1907년 6월 24~25일쯤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6월 15일에 회의가 개최됐으므로 그 며칠 뒤의 일이었다.

세 특사는 헤이그 융호텔(Hotel De Jong)에서 묵으며 호텔에 당당히 태극기를 내걸고 활동을 시작했다. 

세 특사는 6월 29일 만국평화회의의 의장인 넬리도프(Nelidof) 백작에게 한국이 초청받지 못한 것을 항의했으며 일제의 한국주권 침해를 설명하며 의장 직권으로 회의 참석을 요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밖에도 특사들은 미국, 프랑스, 중국, 독일 등 각국 위원에게도 회의 참석을 요구하는 협조를 구했으나 실패했다.

특사들은 결국 회의에 공식적으로 참석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비공식 경로를 통해 일제의 침략과 한국의 요구를 정확히 각국 대표에게 알림으로써 한국문제를 국제정치 문제로 제기시키려는 활동을 폈다. 특히 구미 언론에서 한국문제를 정당하게 다루게 한 것은 매우 주목되는 일이었다. 

헤이그 사행의 활동 소식이 전해지자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1907년 7월 18일 외무대신 하야시(林董)를 서울로 불러들여 광무황제에게 헤이그 밀사의 책임을 추궁하며 강제로 퇴위시켰다. 

선생은 헤이그 사행 이후 미주를 순방한 후 1909년 4월 정재관과 함께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의 의병을 모아 1910년 6월 21일 십삼도의군을 편성하게 됐다.

선생은 십삼도의군에서 외교통신원을 맡아 유인석과 이범윤 사이를 중재하면서 전체 사무와 조직을 관리했다. 

일제의 조국 병탄이 현실화되자 병탄조약 무효를 선언할 항일단체로 성명회를 조직, 독립의 비장한 결의를 담은 '성명회 취지문'을 발표했다.

일본정부에는 국제공약의 배신을 맹렬히 규탄하는 성토문을 보내고 각국 정부에는 '합병무효'를 선언하는 전문과 현지 한인사회 지도자 8624명의 서명록이 첨부된 '성명회 선언서'를 보냈다. 

일제의 항의로 러시아 당국은 선생을 비롯해 성명회와 십삼도의군의 주요인물 42명을 체포했으며 이범윤 등은 중부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로 유배됐다.

선생은 니콜리스크로 추방됐다가 1911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 해 5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광복군 양성에 힘쓴 권업회가 창립됐고 선생은 의사부 의장을 맡게 됐다.

대한광복군정부는 권업회가 양성한 광복군을 기반으로 하고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면서 독립전쟁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러시아 당국의 탄압으로 활동도 어려웠다. 특히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와 일본은 동맹국으로 제휴, 러시아 당국은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인의 주요 지도자들을 체포하거나 추방했다. 

권업회 해산 이후 선생은 1916년 초부터 하바로프스크에서 병석에 누워 투병생활에 들어갔다.

차도가 없자 기후가 온화한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로 옮겨 요양을 했으나 병세가 호전되지 않았고 1917년 3월 2일 48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이상설(우)과 동생 상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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