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태 건양대 교수

 

[월요일 아침에] 박기태 건양대 교수

이제 대지는 겨우내 부스스해진 머리와 몸을 추스르고 제철을 만난 듯 푸르다. 푸르름이 곧 아름다움 자체라도 되듯이 세상의 모든 나무와 풀과 꽃들은 제 나름대로의 빛깔과 향기를 뽐내려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이들이 없으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갈 사람들. 그래서 이들이 없다면 우리네 인간만이 이 세상에서 존재할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을 가져본다. 세상을 온통 덮고 있는 대자연 속의 식물들을 보면서 나는 잠시 엘리어트 시 구절에 나오는 ‘욕정’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성(性)의 원리를 깨닫게 하는 ‘욕정’은 그리고 생의 기원과 다를 바 없는 성(性)은 진정한 의미에서 삶에 대한 원리이며 인간의 욕망을 상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명의 열의를 번뜩이게 하는 지상의 나무와 풀과 꽃들을 보면서 나도 살아야겠다는 열망을 가져 본다. 꽃들은 마음대로 피고 지고 다시 열을 지어 이 세상에 나오고 싶으면 다시 환생해서 되살아 나오지만, 우리 인간은 유한한 일회적인 삶을 살면서 공간 속에 갇혀 사는 또 다른 꽃들이란 생각도 해본다.

평생을 신들린 듯 춤을 추며 살다가 스카프에 목이 졸려 불꽃같은 생을 마감한 이사도라 던컨이나 목이 길어서 슬픈 짐승이라며 어쩌면 자전적 시일지도 모르는 「사슴의 노래」를 쓰고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나에게 레몬을... ...’ 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겨서 더 극적이었던 시인 노천명, 그리고 「풀」의 작가 김수영도 모두 한결같이 일회적인 삶을 살다간 꽃들이 아닐까? 조금은 덜 외롭고 덜 슬픈 꽃들이 있는 반면에, 시간의 흐름이 너무 빠르다고 자조하면서도 그래도 시간은 때론 아름답고 잔인하며 슬프다고 되뇌면서 나처럼 일기장에 무엇인가 긁적이고 있는 슬픈 꽃들이 많이 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지상의 꽃들이 아니 더 나아가 푸르름이 있음으로 해서 아름다운 세상. 이 아름다움이 비워져 버린 세상은 상상할 수가 없다. 이런 감동은 우리 인간들에게로 옮겨간다.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상큼하다. 바람 속에서 상큼한 내음을 맡을 줄 아는 사람은 아름답다. 바람이란 냄새가 없는 줄 알면서도 상큼하고 싱그러운 냄새가 그 속에 있다고 믿는 사람은 분명 사물에 눈 뜨는 해안을 가졌을 것이다.

문득 어린 시절의 추억이 생각난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꽃을 무척 좋아하셨다. 그런 까닭에 우리 집 꽃밭에는 없는 꽃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이사소식에 형들과 누나 그리고 나는 우리 가족이 함께 만들고 가꾸어 왔던 꽃밭을 생각하면서 아쉬움에 잠긴 적이 있다. 하지만 이사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린 우리를 위해 이사 가는 전날까지 꽃밭을 가꾸어 우리를 즐겁게 해주셨다. 그리고 이사하던 날 아침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 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라는 동요를 불렀던 어린 시절 추억이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지금도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하면 아버지가 꽃을 가꾸시던 모습이 선하게 보이는 듯하다. 아빠! 하고 부르면 반가워하시며 품에 꼭 안고 여느 때처럼 맞아 주실 모습이 무척 그립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셔서 더 이상 뵐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그 순간이 어색하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그 이름 아버지를 불러본다. ‘아버지’ 라는 명사 하나로도 전신이 떨려오며, 내 영혼의 그림자는 가슴앓이를 한다. 유난히 파아란 하늘과 대지의 푸르름이 지금 여기 있듯이 항상 나의 감수성을 자극하시고 선한 마음으로 세상에 대한 해안을 가지도록 무언으로 가르쳐주신 아버지는 언제까지나 나의 마음속에 늘 푸르게 살아계신다고 느끼면서 꽃피고 아름다운 이 계절에 내 인생 부활의 꿈도 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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