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일보 사설] 선거법개정안과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검경수사권조정 법안 등의 패스트 트랙(신속 처리 안건) 지정을 둘러싸고 벌어진 여야의 물리적 대결과 국회의장·여야 원내대표 검찰 고발 사태를 보는 국민들 마음은 무겁다. 게다가 같은 시기에 나온 충격적인 마이너스 경제성장 실적 소식까지 겹쳐 실망감을 더해 줬다. 날치기, 농성, 빠루 등의 낱말이 난무하는 풍경은 한국의 정치풍토가 매우 척박하다는 것을 재삼 확인시켜준다.

해외경제가 위기 상황이 아닌데도 성장률이 뒷걸음질 친 것은 최저임금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을 골자로 한 소득주도성장 정책, 탈원전 정책 등 경제상황을 무시하고 이념적 판단을 무리하게 밀어붙인 탓이 크다. 결과적으로 역시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은 꼴이다.

일련의 사태들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1995년 베이징에서 “한국에서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고 평가해 물의를 빚었던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이 회장은 국민들로부터는 바른말을 했다는 공감을 얻었으나, 이 발언으로 YS(김영삼) 정권의 미운털이 박혀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권에 대한 국민 대다수의 평가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관측된다. 오히려 정치 수준은 24년 전보다 낙후됐고, 질적 수준은 더 낮아졌다는 평가를 받지 않을까 걱정된다.

우선 국회의장이 팩스를 통해 전달된 사보임 신청을 접수하고 결제한 것이 여야 대결의뇌관이 됐다는 점이 아쉽다. 국회법이 회기 중에 사·보임을 못하도록 한 규정도 단서조항 해석에 의해 무력화 됐다. 이 규정은 국회의원 개개인이 하나의 헌법기관으로서 소속당이 아닌 국가와 국민을 위해 소신껏 활동하도록 보호해주기 위한 장치다.

패스트트랙에 지정하는 것이 옳지 않아 반대표를 던지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소속당은 그를 해당 위원회에서 퇴출시켰다. 갖가지 이유를 댔지만 한마디로 소신껏 일하는 소속 의원의 손발을 묶고 입에 재갈을 물린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야당 스스로 국회의원의 정치활동 보호 장치를 걷어찬 격이다.

특히 선거법 개정안의 골자인 ‘권역별 연동형비례대표제’는 국회의원 자신들도 잘 모를 거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복잡하다. 지역구 의석을 줄이고 비례대표 의석을 47석에서 75석으로 늘린다는 것인데, 사표 방지를 위해 복잡한 배분방식을 적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군소정당들의 의회 진출과 의석수 확대 가능성을 높였다.

개정안을 발의한 여야 4당은 사표를 방지하고 다당제를 정착시켜 거대 정당의 권력독점을 방지한다고 명분을 내세우지만, 1표라도 많이 얻으면 인정하고 따라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인 다수결 원칙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측면을 부정할 수 없다. 또 비례대표제를 폐지하고 국회의원 수를 줄여야 한다는 여론의 흐름과도 어긋난다.

당리당략에 따라 불법과 합법을 넘나드는 막무가내식 합의안 처리, 반대 의원에 대한 징계, 중립과 품격을 지켜야할 국회의장의 경솔한 처신 등은 한국정치의 후진적 자화상이며 수십년 전에 이미 사라졌어야 할 행태들이다. 모두가 자성하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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