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연덕 칼럼니스트

[기고] 장연덕 칼럼니스트

'분쟁:서로 시끄럽게 다툼, 패로 갈라져서 다툼. ' 분쟁의 사전적 의미입니다. 저는 오늘도, 어제도, 작년도 올해도, 계속 분쟁을 해오는 중입니다. 제가 사는 나라도 그렇게 분쟁하는 나라입니다. 태어나보니 그런 나라에 살고 있었습니다. 분단국가가 지구상에 몇 안된다는데, 그중에 하나인 대한민국이 제가 태어난 나라였습니다. 국어를 배울 때 쯤에 일본을 배웠습니다. 일본이 나라말을 빼앗은 적이 있었단 사실을 배웠습니다. 어쩐지 할머니께서 일본어를 간혹 쓰시는 소리를 들어봤습니다. 바느질을 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소핵교때 일본말 배웠지, 일본은 절대로 믿으면 안된다. 응?"

안경너머로 건너다 보시며 진지하게 어린애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기억이 납니다. 이 지면에, 굳이 나라 밖과 분쟁을 겪은 일들을 요약하진 않겠습니다. 너무나 긴 얘기들이고 그 참담함과 슬픔이 말로 옮기기 어렵다는 것은 우리 국민들이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 우리에게 당장 주어진 분쟁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내부의 분쟁을 해결하지 못해서 아직도 외부에서 받은 손해에 대해 분쟁도 협상도 제대로 못해온 약소한 나라의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남과 북, 그리고 정치색이라는 주체의 이름을 가진 분쟁. 어쩌면 우리는 분쟁에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이것을 넘어서는 결정은 못 내리는 국민성을 가진 사람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어제와 지난달을 생각해보니, 저 역시 패로 갈라져서 다퉈야 한다는 기준하에, 사람을 가르고 잘잘못을 가려내려고 들고, 시끄럽게 말을 하고 따졌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작고 큰 일들 위에서 분쟁이라는 모습으로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기만'  해온 시간들이 참 후회가 되고 그것이 진보가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야 소소하게 느낍니다.

왜냐면, 마음안에 분쟁이 사랑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자각이 조금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입니다. 분쟁은, 나를 지키려고 하는 것이고, 사랑은 우리를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 후자를 선택하지 못하고 분쟁만 반복하면서, 나와 나와 비슷한 것, 나를 지지하는 것만을 곁에 두려고 하며, 서있는 내 이 자리를, 좁아지게 만드는 일을 반복해왔는지 한 인간으로서 반성해봅니다.

세월호냐 아니냐, 우파냐 좌파냐, 이런 분별과 더 나아가 분쟁이라는 모습안에서, 한 가지 떠올려보셨으면 합니다. 세월호가 가라앉은 바다는 어느 나라 바다인지, 나와 정치색이 다른 저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떠올려 보셨으면 합니다. 이런 분쟁의 습성이 다시 한 번 발현되는 이 나라에, 통일이 온들 또 다른 한국전이 발발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은 비현실적인 것입니다. 정치가, 경제력이, 혹은 외부의 어떤 도움들이 이 나라를 안전하게 통일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인 국민들이 분쟁보다 더 나은 것을 선택하는 노력이 그전에 한 번은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조선이 멸망하고 나라의 말을 뺏길때에, 그때도 정치는 분열하고 신분간의 차별은 여전했습니다. 편을 가르고, 싸웠습니다. 오늘 이 시점, 펜을 가진 저 역시 그렇게 분쟁해서 이기면 되는 줄 아는 습성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원래는, 같은 사람인 줄을 모르고 이러는 중입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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