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정숙 수필가

 

[백목련] 육정숙 수필가

남쪽 바닷가 그 하얀 공간의 낯빛은 왜 그리도 서늘했던지. 생명이 얼어붙은 동토의 시간 속으로 웅크리고 앉은 시간들. 그러나 바다는 순순하지 않았다. 말이 필요 없었다. 망설임도 없다.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멀찌감치 달아났다가 휙 돌아와 몸으로 부딪친다. 그리곤 하얗게 부서져 내렸다. 5월의 바닷가 하얀 포말은 공간으로 그림처럼 쏟아져 내리고 그를 바라보는 이의 여린 코끝이 시렸다. 아니 눈도 시렸다. 콧물인지 눈물인지 짜디짠 바닷물인지 그냥 쏟아져 내린다. 동굴 속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던 속내를 풀어내는가! 끝없이 출렁이는 광활한 바다는 거대한 파도를 자꾸만 만들어 냈다. 밀려와 바위를 후려치고 가는 풍경들이 그냥 후련했다.

오월인데 나는 옷깃을 여민다. 어디선가 스며드는 냉기가 온 몸을 움츠러들게 한다. 포말 속으로 젖어드는 어머니의 시간들이 멀어져 갈수록 흔적들은 더 선명해졌다. 작은 귀로 들려오는 파도소리가 점점 더 나를 다그친다. 매직 쇼를 하듯 푸른 바다는 넘실넘실 어머니의 눈가에 그리움을 퍼 온다. '돌아보면 너희들 어려서 아옹다옹 키울 때가 제일 좋았느니라'

이제야 어머니의 시절을 본다. 어머닌 내게 처음부터 어머니였기에 몰랐다. 늘 어머니였기에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녀도 소녀였고 여인이었다는 것을. 침대에 납작 붙어서 모진 세월을 붙잡고 있는 어머니!  파도가 느닷없이 다가와 내 작은 낯짝을 후려친다. 파도 속으로 빨려 들것만 같다. 두려움이 인다. 묘한 긴장감이 공간을 에워쌌다. 시간에 밀려 온 빨간 카네이션 한 송이! 어머니의 가슴에서 피어올랐다. 내 가슴에도 한 송이 피었다. 어머니를 돌아본다. 어머니가 걸어 간 길 위에 내가 서 있다.

'마음은 아직 청춘인 것 같은데 몸이 말을 안 들어, 어쩔 것이여!' 오물거리는 어머니의 언어가 거대한 파도로 또 다시 밀려온다. 열정 하나로 피워 올린 붉은 카네이션 한 송이! 붉은 입술로 내게 물어온다. 삶이란 순리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나는 말없이 서 있다. 시린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에서 일렁이는 수평선을 좇는다.

"툭" 뭉툭한 소리를 좇아 시선이 따라갔다. 꽃피고 새 소리 아름다운 봄이 가고 있다. 어머니의 시간도 시들어가는 꽃잎에 머문다. 파도에 한 송이 카네이션을 띠웠다. 잠시 주의를 머물다가 파도에 휘말려 사라져버렸다. 바다는 이미 그 시간들을 알고 있었던가! 오래 전 부터 콰르륵 콰르르륵 아우성을 쳐댄다.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현실 속으로 뭉텅 떨어져 가는 꽃송이! 바다보다 깊고 넓은 어머니의 가슴 속, 깊은 동굴 속에서 묵직하게 들려오는 그 시간의 선을 쫓는다. 그녀는 또 다시 그리움에 멈춰 있겠지.

어머니 가슴에 남은 꽃잎은 여전히 붉고 고운데!  요양원 창밖으로 시간이 흐르니 모였던 구름도 어딘가로 흩어져간다. 그 사이로 내리는 햇살에 눈이 시리다. 눈가가 촉촉이 젖어든다. 바다는 여전히 온 몸으로 소리를 지르고, 침대에 납작하게 붙어버린 어머닌 소녀시절 꿈을 꾸시는가! 갈매기 한 마리 까마득한 하늘로 날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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