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수요단상] 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다. 특히나 죽음은 모든 생명이 가진 결정적인 한계이다. 역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극복하려 했다는 것은 곧 죽음이라는 한계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흔한 말로 어느 누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이처럼 ‘한계’란 거의 대부분 좋지 않은 것, 혹은 어떻게 해서든 극복해야할 대상으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어느 누가 자신에게 있는 한계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는 자신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할 것이다. 하나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한계를 만나게 되어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도전하고 또 도전할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멈추지 않고 자신의 한계와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을 좋아한다. 그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며 결국 그 한계를 극복했을 때 경의를 표하기도 한다.

매 4년 마다 열리는 올림픽 경기에서 이처럼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수많은 선수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선수들 모두는 서로가 서로에게 경쟁 상대이기도 하지만 사실 선수 자신의 가장 큰 경쟁자는 바로 자기 자신의 한계이다. 선수들을 매번 대회가 열릴 때마다 이와 같은 한계와 싸워 승리하기 위해서 말 그대로 피나는 노력을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바라던 대로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축하와 격려의 박수를 받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관심은 늘 승리자들을 향하기 마련이다.

이와 반대로 성경은 예수를 오직 성경 말씀의 유일한 주인공이라고 증언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성경은 예수의 최후를 로마의 사형제도 중 하나인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것이었다고 말한다.극악무도한 사람들을 처형하기 위해 존재했던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한 예수가 어떻게 해서 기독교의 중심이 되었는가? 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이러한 비참한 최후, 어쩔 수 없는 한계 앞에서 초라하게 생을 마감한 한 인간의 인생을 그토록 주목하는가?

성경의 말씀에 따르면 ‘한계’란 늘 항상 극복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 자신의 한계는 지금 자신이 추구해야할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한계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의 한계를 오직 극복과 정복의 대상이 아니요 오히려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해야 할 동반자로서 인정하고 받아드릴 때 우리의 삶의 방향 역시 극적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한계와의 싸움에서 패한 자의 최후가 아니다.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를 위한 새로운 방향제시인 것이다. 모두가 올림픽 경기의 승자가 될 수는 없다. 모두가 자신의 한계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 타인과의 경쟁에서 실패하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한다 하더라도 그의 삶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며 또한 그 모습은 그리 절망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함으로써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치열하고도 멈추지 않는 경쟁과 싸움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놀라운 해방을 통해서 자신의 삶이 여전히 얼마나 풍요롭게 여유가 넘치는 삶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어떤 한계들은 분명 넘어서야할 문제이기도 하지만 어떤 한계들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소모적인 경쟁과 싸움을 피할 수도 있다. 물론 어떤 한계와 싸울 것이며 어떤 한계를 인정할 것인지 선택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하지만 이 선택의 지혜로움은 생각 이상으로 우리에게 많은 유익과 시간적 물질적 여유를 선물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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