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회 전 오근장동장

[충청시론] 김복회 전 오근장동장

이 년 전에 큰 맘 먹고 살고 있던 집을 리모델링했다. 퇴직 후 좀 더 편안한 집에서 삶을 누리고 싶어서였다. 지금 생각하니 참 잘했다. 잘 아는 지인이 집수리를 해주면서 앞마당에 있는 보도블록을 걷어내고 남새밭을 만들어 줬다. 좁은 면적이지만 채소 몇 가지를 심어놓으면 키우는 재미가 쏠쏠할 거라 했다.

우리 집에는 20년 된 라일락이 한 그루 있다. 해마다 봄만 되면 진한 향기를 뿜어내어 지나가는 행인들까지도 향에 취해 행복해 한다. 라일락이 고목인데다 덩치가 커 그늘이 많아 음지에서도 잘 자란다는 취나물과 참나물을 심었다. 그 때 심었던 취나물과 참나물이 올 봄에도 삐죽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겨울을 무사히 보내고 내민 새싹들이 대견스럽기만 하다. 햇나물이 나오고 날씨도 포근하여 상추, 고추, 방울토마토, 오이 모종을 사다 심었는데 일교차가 큰 탓인지 금세 죽어 몇 번을 다시 사다 심었다. 작년보다 더 잘 키워보고 싶은 마음에 친정에 가서 거름도 가져다주고 물도 열심히 주어 목을 축여 주었다.

어느 날 방울토마토 모종에서 제비 주둥이 같은 노란 꽃이 나오더니 그 속에서 앙증맞은 토마토 모습이 보인다. 옆에 있던 오이도 이에 질세라 꽃잎을 떨구더니 아기 손톱만한 오이가 맺혔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모습이 신기하여 새벽기도가 끝나고 들어오자마자 그것들을 살펴보며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 마음이 이와 같이 흐뭇하지 싶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옆에 있던 빨간 넝쿨장미도 이를 시샘하듯 꽃 봉우리를 터트렸다.

게다가 앞 집 어르신이 심어보라고 준 호박씨도 물기 젖은 흙살을 비집고 싹을 밀어 올렸다. 땅을 뚫고 올라오는 작은 호박씨의 뜨거운 기운이 느껴진다. 작년에도 심었었는데 아마추어 주인을 알아보듯 한 개의 호박만을 맺었다. 워낙 날씨가 더워 열매가 열리지 않는다고들 했지만 대신 호박잎을 맛나게 먹을 수 있었다.

필자는 이렇게 꽃나무도 심을 수 있고 채소도 심을 수 있는 주택이 참 좋다. 요즘 자고나면 새 아파트가 보일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서 도로변 곳곳이 고층아파트로 삭막하기 그지없다. 고등학교 일학년 때 청주의 호두나무 고개 주변에서 자취를 했었다. 그 시절이 그립고 생각나 찾아보려 했지만 그때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고 다행히도 호두나무 식당이라는 간판이 남아 있어 서운함을 면했다. 역시 거기도 대규모 아파트 건설을 위해 주택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몇 십 년씩 정을 나누던 골목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있다. 가족과 함께 했던 나무와 꽃들은 굴삭기에 찍혀나가고 오월의 빨간 장미 몇 송이가 집터임을 증언할 뿐, 그들의 추억마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있다. 사람냄새 나던 골목이 없어지는 것에 더없이 서운함이 밀려온다. 많은 이들이 아파트를 선호하는 요즘, 꽃과 채소를 가꿀 수 있는 흙냄새 나는 주택이 좋은 필자를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앞으로 손자들과 함께 꽃을 심고 채소를 가꾸는 남새밭 있는 내 남은 인생이 곧 행복이지 싶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