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박기성 (朴基成·1905년 6월~1991년 2월 1일)

▲ 1939월 11월 17일 김구 등과 함께 찍은 한국청년전지공작대 환송식. 둘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박기성.
▲ 중국군관학교 졸업 당시 박기성 1937년.

1919년 3·1운동에 참여
日 유학 시절 아나키즘 수용
귀국 후 감시 피해 중국 망명
주로 선전활동·친일분자 처단
광복군 편입 후 군사교육 담당
해방, 6·25 후에도 활발히 활동

[충청일보 배명식기자] 박기성은 충북 진천 출신으로 한국청년전기공작대에서 적후방공작을 4년간 벌였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서 근무했다.
박기성은 1905년 6월 부친의 세거지인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증평군 도안면 화성리 외가에서 보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으며 1924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고학생으로 요쓰야소학교, 가이세이중학교를 다녔다. 당시 재일한인들은 민족적 차별과 계급적 착취로 사상 단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고학생들은 주로 아나키즘을 수용했다. 박기성도 아나키즘 사상을 수용한 뒤 1928년 자유청년연맹을 조직해 반일·반공산주의 노선을 중심으로 친일단체 상애회에 대해 투쟁을 벌였다.

1929년 국내에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재일 아나키스트들을 규합하고자 했다. 원심창과 한하연을 찾아가 광주학생항일운동에 가담하자고 권유했다. 그러나 이들은 때를 기다리자며 말렸고 일본 내 활동의 제약을 느낀 그는 1929년 11월쯤 홍영유와 함께 귀국했다. 귀국 후 일제의 지속적인 감시가 있었고 결국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 상하이로 이동한 박기성은 아나키즘 계열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해 선전활동과 친일분자 처단에 가담했다. 

그는 선전용 출판물을 작성하는 문서부의 위원으로 활동했고 남화구락부에서 동지들과 함께 아나키즘 연구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리고 남화한인청년연맹의 강령을 기반으로 사회혁명 실행의 임무를 맡았던 실행부의 위원으로 활동했다.
1931년 12월에는 동아시아 아나키스트들의 자유연합 조직인 항일구국연맹의 흑색공포단에 입단해 정보부에서 활동했다. 
1934년 9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11기로 입교해 중국군에 참여했다. 박기성은 중국군 참여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생각했다.

1939년 10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 결성에 참여해 군사조장을 맡았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초모공작활동과 적군에게 일본군벌의 죄악상을 폭로해 반전사상을 고취시키며 적의 군사 기밀을 정탐하는 일을 했다. 박기성은 서안에서 적후방공작활동을 펼쳤다.
1941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되면서 5지대에서 훈련조장을 맡았다. 편입 이후 주로 군사교육에 전념했고 한국청년훈련반 2기, 3기 훈련에서 2구대장을 맡아 군사교육을 담당했다.
1942년 지대 개편으로 중경의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로 자리를 옮겨 광복 때까지 활동했다. 1945년 12월 귀국, 1946년 육군사관학교 3기 특별반으로 입교한 그는 3월 20일 최덕신·박시창 등과 함께 대위로 임관해 총사령부에 배치됐다가 부산 5연대 대대장으로 부임했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2사단 5연대장, 대구 1훈련소 부소장 등에 임명됐다. 1952년 101사단장으로 전임됐고 1960년까지 대령으로 근무하다가, 준장 진급 이후 전역했다.
예편 후 그는 1969년 최초로 독립운동사를 집대성하기 위해 구성된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 참여했다. 1985년부터 2년여 동안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을 역임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역사적 정립을 통한 민족정기의 회복에 노력했다.
정부로부터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1963년 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1991년 2월 1일 사거 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2015년 10월 17일 독립기념관 추모의 자리 인근에 일생을 한국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한 박기성 장군의 어록비를 세웠다. 
어록비문은 "우리가 일치단결하여 강건한 독립정신으로 무장한다면 일본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로 박기성 장군의 강인한 독립정신을 잘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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