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수요단상] 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새 술은 새 독에 담자고 한다. 그것은 탈바꿈하자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은 나비처럼 탈바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내리받이의 길을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문화의 동물이다. 문화는 돌연변이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수많은 시간을 들여서 쌓은 삶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러한 흔적을 떠날 수가 없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근지러운 등을 비빈다고 한다. 문화라는 삶의 흔적은 그러한 언덕이나 같다.

공자께서는 따라했을 뿐 조작하지 않았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고 말씀한 것을 우리는 다시 새겨 보아야 한다. 이 말씀을 듣자면 두 갈래의 의문이 생긴다. 따라하는 것(述)을 무작정 흉내 내는 것으로 새기면 될까? 조작하는 것(作)을 창조라고 여기면 될까? 짚신을 고무신으로 바꾸고 고무신을 구두로 바꿔 신었다고 발까지 바꿔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일에는 근본이 있고 말단이 있게 마련이다. 발이 근본이라면 신발이란 말단일 뿐이다. 말단은 근본을 바탕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발에 맞춰 신발을 신으면 된다. 구두를 신는 시대에 짚신을 신어야 한다고 우긴다면 공자의 말씀에 어긋난다. 공자께서 따라한 것은 믿을 수 있고 좋은 옛것이기 때문이다. 짚신이 발보다 크면 뒤축이 한사코 벗겨져 편안하게 걸음을 걸을 수 없게 된다. 또한 짚신이 너무 작으면 뒤축이 발뒤꿈치를 갉아 발목이 부어 걸음을 걸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짚신이 신발 구실을 제대로 하려면 발에 딱 맞아야 한다. 여기서 발에 신발을 맞춰야지 발을 신발에 맞출 수 없다는 진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진실은 구두에도 통한다. 구두 역시 발에 맞춰야 신발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이러한 진실을 공자는 따랐고 밝힌 것이다. 그러면 공자가 믿고 즐겨 따랐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의(仁義)의 도(道)이다. 그리고 그 도를 널리 펼치는 것이 곧 덕(德)인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부덕(不德)이며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면 덕(德)인 것이다. 물건이나 지식은 교류되지만 덕(德)은 팔고 살 수가 없다. 덕이라는 것은 삶을 타고 면면히 내려오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전통주의가 확립되는 것이다.

서구는 전통을 파괴로부터 창조로 이어지는 발전론의 모체로 보지만 동양은 전통을 전수받을 권위로 보았다. 이러한 권위는 분명 미래를 향하는 발전론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를 지닌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을 부정하고 내일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근본을 존중하면서 변화하자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옛것을 살펴서 새것을 알아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신발은 바꿔 신어도 발을 잊지 마라는 것이며 호랑이 잔등에 업혔더라도 정신을 잃지 마라는 뜻으로 새기면 될 것이다. 발에 맞는 새 신을 고르자면 발의 크기를 먼저 알고 있어야 한다. 새 신이 좋다고 무턱대고 덤비다 보면 발병이 나고야 만다. 이러한 발병을 미리 막자면 돌다리도 두드리면 건너가는 마음이 필요하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곧 전통주의요 그것을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고 봐도 된다.

옛것을 위하여 새것을 배척하거나 배타할 필요는 없다. 본래 덕이란 하늘의 햇빛과 같은 것이지 관청에서 발급한 증명서 같은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덕은 어떤 이념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덕을 알고 실천했던 성인, 현자들의 빛을 받아 인간의 정신을 싱싱하게 하면 된다. 햇빛을 받지 못한 푸성귀는 죽고 말듯이 사람도 덕이라는 빛을 받지 못하면 인간성이 모질어지고 말라 버리고 만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