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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생 아버지, 나라를 지키다김종원 전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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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6.09  13: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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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원의 생각너머] 김종원 전 언론인
 

1932년생인 아버지는 6.25 한국전쟁 참전용사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참전'이란 단어가 참으로 참담하게 들려온다. 한반도내 같은 민족끼리 싸우는 전쟁이라니. 한국전쟁이 1950년 6월25일 터졌고, 아버지는 그 당시 19세였으니, 참전을 할 만한 나이였는지부터 의문이다.

아무튼 아버지는 강원도 전선에서 소대장 업무를 수행하다가 중공군과 접전을 벌이게 됐고 숫자적 열세 속에 소대원들을 모두 투항하게 하고 본인은 동굴 속에서 칼빈 소총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아마도 소대장이라는 책임감과 소대원들을 희생할 수 없다는 상충된 상황에서 나온 행동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칼빈 소총 총알이 심장 바로 옆을 뚫고 지나가는 바람에 죽음의 문턱을 넘었고, 중공군 포로가 돼 압록강 입구까지 끌려갔다. 이후 포로교환 때 자유의 다리를 건너 고향에 갈 수 있었다. 아버지 고향에선 아버지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살시도 후 중공군에 끌려갔으니 '죽은 목숨'이 아니었겠는가.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자 고향 동네에선 '묘 자리 잘 썼다'는 조상은덕을 거론하기도 했다니, 과거엔 잘 되면 조상 탓, 못되면 내 탓이었나 싶다. 아버지는 그 때 기억을 더듬어 '표류기'라는 자전적 논픽션을 저술하기도 했다. '표류기'는 젊은 시절 끔직한 전쟁을 기록한 것이긴 하지만, 적군인 중공군 간호장교의 애정 어린 치료가 등장하는 등 사람 사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아버지는 표류기를 쓴 이유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하셨다. "전쟁의 비참함을 글로 남기고 싶었고, 특히 같은 민족끼리 이런 전쟁을 벌여야 하는 이유를 누구도 명확하게 이야기 하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로서 그 때 그 감정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올해 6.25 전쟁이 일어난 지 69년이 된다. 내년엔 70년이 된다. 6월이 호국 보훈의 달인 이유도 사실 한국전쟁 때문일 것이다. 이 전쟁으로 남한 쪽에선 민간인 사망자 24만5000여명, 학살된 민간인 13만여명, 부상 23만명, 납치 8만5000여명, 행방불명 30만3000여 명으로 모두 100만 여명의 피해를 입었다. 한국 국방부와 군사 편찬 연구소의 자료다.

그러나 한국 전쟁 유족회와 학자들은 학살된 한국인만 10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1953년 북한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북한 민간인 사망자는 28만2000명, 실종자 79만6000명이다. 이것은 당시 남북한 전체 인구의 1/5이 피해를 입었으며, 개인별로 보면 한 가족에 1명 이상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숫자로 보는 세계, 6.25 전쟁과 관련된 통계-VOA 한국어 방송에서 인용)

북한에도 아버지와 같은 1932년생 어르신이 계실게다. 20대 앳된 나이에 전쟁을 경험한 북한 노인은 한국전쟁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 할지 궁금하다. 그 분도 아버지처럼 자신의 경험을 글로 남겼을 지도 모르겠다. 북한식 표류기는 어떻게 기록돼 있을지 궁금하다. 이제는 함께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남북한이 한국전쟁에 대한 평가도 함께 해야 할 때가 된 것 아닐까. 나라를 지켜주신 아버지들께 감사를 드리며, 나라를 가꾸어온 어머니들께도 고맙다는 말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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