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일보 사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거행된 64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추념사를 통해 일본 강점기 조선의용대를 이끈 항일 무장독립투쟁가 약산 김원봉(1898∼1958)을 언급하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돼 마침내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다"고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이어 "통합된 광복군 대원들의 불굴의 항쟁의지, 연합군과 함께 기른 군사적 역량은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동맹의 토대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회를 보수와 진보,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며 "애국 앞에 보수, 진보가 없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의 이날 발언 후 청와대 관계자는 "애국 앞에서 이념의 문제나 정파의 문제를 뛰어 넘자는 것이 문 대통령 발언의 취지"라며 "발언을 문맥 그대로 이해해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지만 앞으로 김원봉에 대한 재평가와 독립유공자에 포함시키려는 움직임이 예상된다.

김원봉의 서훈 추진은 문재인 정부 들어 본격화됐다.

문 대통령은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였던 지난 2015년 8월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광복 70주년을 맞아 약산 김원봉 선생에게 마음속으로나마 최고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 드리고 술 한 잔을 바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문 대통령은 당시 글에서 "이제는 남북 간의 체제 경쟁이 끝났으니 독립유공자 포상에서 더 여유를 가져도 좋지 않을까"라며 "일제 시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대로 평가하고, 해방 후의 사회주의 활동은 별도로 평가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항일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길이기도 할 것"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그 해 7월에는 당직자들과 영화 '암살'을 관람한 뒤, 극 중 인물로 등장한 김원봉에 대해 "정말 치열하게 무장투쟁한 분인데, 해방 후에 북으로 갔다 얼마 있어 숙청됐다. 남에서도 북에서도 설 곳이 없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김원봉이 월북 이후의 행적이다.

1898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한 김원봉은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해 국내 일제 수탈 기관 파괴와 요인암살 등 투쟁을 전개했다.

문 대통령이 언급한 대로 광복군에 합류한 뒤로는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했고,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도 지냈다.

그러나 1948년 월북한 이후 그해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이 됐고, 국가검열상, 노동상에 오르는 등 요직을 맡았다.

특히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사위원회 평안북도 전권대표로서 후방에서 북한군의 군량미를 생산하는 일을 했다.

그는 조국해방전쟁(6.25)에서 공훈을 세웠다는 이유로 훈장까지 받았다.

남파활동도 벌여 1954년 1월 25일 김원봉의 직접 지휘 하에 대한민국 경제 혼란 및 선거 방해를 목적으로 남파된 간첩단 4명이 체포됐다.

북의 남침으로 발발해 수백만명이 목숨을 잃은 민족상잔의 비극은 아직도 상흔이 남아 있다.

북한은 이에 대해 사과한마디 없고, 남북간 화해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김원봉에 대한 서훈은 시기상조다.

현행 독립유공자 서훈 기준으로는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인물에 대해서는 유공자 포상이 불가능 하다.

정부는 김원봉의 서훈 추진보다 70여년전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분들과 그 유가족들에 대해 더 많은 배려를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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