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태 건양대 교수
[월요일 아침에] 박기태 건양대 교수
오월의 꽃향기가 그립다. 가끔씩 내리는 빗줄기와 그 틈새로 파고드는 여름날의 무더운 열기가 우리를 지치게 한다. 해마다 여름이면 더위에 굴종해야만 하는 나는 올해도 계절의 순환에 따르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만이 최소한의 예의라고 받아들일 생각이다.
그래서 향긋한 오월의 꽃내음이 잊혀질 듯하다가도 마치 헤어졌던 옛사랑이 떠오르듯 어느 한순간 불현듯 생각나 가슴 깊이 그리워지기까지 한다.
사람들은 흔히들 지나간 사랑에 대하여 친구로 남을 수 있는 사랑과 그렇지 않은 사랑으로 나누어 이야기하곤 한다. 예컨대, 사랑하는 동안 수없이 많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함께 쌓았던 둘 만의 추억들이 누구의 잘못이든 어느 한순간 무너져 파편으로 변해버린다면, 좋았던 순간들만 모아서 추억의 부스러기를 주워들었을지언정 이미 시간은 흐르고 둘 사이에 감정의 골이 파여 굳이 연락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해가 지난 후에 예전처럼은 아니지만 친밀한 관계로 다시 만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덥고 습한 공기와 함께 더위가 엄습해오는 계절, 나의 출퇴근길이 가끔씩 즐거울 때가 있다. 내가 출퇴근하는 시골 길 한 모퉁이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는 고등학교 때문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학교 정문 앞에 서있는 조그만한 푯말 때문이라고나 할까? 거기에는 '꽃이 피면 뭘해도 좋지만 너를 만나면 더 좋다' 라는 정감 넘치는 글귀가 있다.
무심코 지나쳤던 길목에서 처음 그 문장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정겹고 마음이 설레이던지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시인 정호승님의 "풍경 달다"의 시구절 '먼데서 바람 불어와 / 풍경소리 들리면 / 보고싶은 내 마음 / 찾아간 줄 알아라'를 처음 접했을 때처럼….
마음에 담아 둔 이와의 만남은 소원할지라도 멀리서 서로를 생각하고 추억을 공유하며 서로의 기억 속에서 살아 있으면 그 자체로 힘이 되고 기쁨이 될 것 같다.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의 방식으로 서로를 응원해주며 가끔씩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땐 연락할 수 있는 그 자체가 행복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인간관계론'을 저술한 미국의 작가 데일 카네기(Dale Carnegie)는 그의 저서에서 마음에 둔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길을 걷는다면 십 리를 걸어도 다리 아픈 줄을 모르지만, 마음이 맞지 않는 낯선 사람과 같이 걷는다면 오 리길도 진력이 난다고 하였다.
사실 우리의 감정이 전혀 잔존하지 않는 지나간 관계를 이야기하자면 상대의 이름을 분명하게 하는 성향이 농후하다. 그렇지만 첫사랑이나 옛사랑을 추억할 때는 이름을 부르는 대신에 '그 사람' 또는 '그'는 이라고 말한다. 이유는 딱히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러한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마도 사랑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꽃이 피면 뭘 해도 좋지만 너를 만나면 더 좋다'라는 문장 속에 숨겨진 은유처럼 우리의 마음 속에 좋은 사람 하나쯤은 담아두고 간직하며 남들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아껴 부르는 것 또한 깊은 의미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다시 한 번 옛사랑 '그 사람'을 생각하며 고즈넉하게 암송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