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학 진천군청 전 회계정보과장

[기고] 정종학 진천군청 전 회계정보과장

창밖을 바라보니 들판의 푸른 녹색 틈새에서 황금빛이 이슬처럼 반짝거린다. 청년시절에 흔하게 봐온 보리밭이다. 보리를 거둘 때면 장마철이 시작되고 울타리에 노랗게 익은 살구가 군침을 돌게 했다. 보리밭을 보니 새삼 옛 추억이 스친다. 보리 밟기, 탈곡, 정부수매 등 몹시 힘겨운 농사일을 거들었다. 별빛에서 보리까락 모닥불에 햇감자를 구워 먹으며 온 가족이 구수한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생생하다.

반세기전만 해도 온 동네가 쌀밥은 아예 구경도 못하고 보리밥이나 잡곡밥만 먹었다. 쌀밥을 먹을 때는 명절이나 제사 때 밖에 없었다. 그 시절은 너나 할 것 없이 연발로 보리방귀를 뿡뿡거리며 스컹크처럼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오로지 깡 보리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이 십리 길 학교를 걸어서 다녔다. 허기를 못  참아 점심시간 이전에 도시락 까먹기가 일쑤였다. 더 어려운 학우는 밖에서 밥 대신 물배를 채우고 그늘진 곳에서 한숨지었다.

이토록 하루 세끼, 아니 두끼 혹은 한끼를 채우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상류사회 계층만 남부럽게 흰쌀밥을 먹으며 부를 과시했다. 근대화 과정에서 새로운 '통일벼'를 재배하며 쌀만은 자급자족하고 있다. 이처럼 오천년 이 겨레의 찌든 가난을 이겨내고 절대빈곤에서 벗어난 것이다. 현재는 쌀 소비량까지 줄어들고 묵은 쌀이 남아도는 실정이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고 식성도 바뀌며 건강관리를 위해 별미로 맛보고 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심각한 식량부족으로 수많은 동포들이 굶주린다고 한다. 인도적 식량지원을 모색해보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요원한 듯하다. 우리는 빈부 격차의 심화로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는 계층이 늘어나는 것 같다.

유년 시절 별 마당에서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오른다. 옛날에 어떤 임금님께서 왕비를 잃고 새 왕비를 간택하려고 면접을 시작했다. 이런 저런 질의 끝에 "고개 중에 어떤 고개가 제일 넘기 힘든 가"라고 묻자 "한 처녀가 보리 고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겨울 양식이 다 떨어지고 햇보리는 아직 나오지 않아 실로 넘기 힘든 고개"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왕을 탄복시켜 영조대왕의 후기로 뽑혔는데 이가 곧 정순왕후다. 260년 전 1759년 그의 나이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요즘 경제 흐름이 금융위기 때보다 더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최근의 경제지표를 들을수록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든다. 국민 모두가 마음을 모아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는 혜안(慧眼)이 절실하다.

우리는 일의 가치를 깨어 세상에서 제일 넘기 힘든 보릿고개를 넘어온 민족이다. 더욱이 미래의 주인공 청소년들이 기쁨과 새로운 희망의 등불을 밝혀주고 있다. 축구사상 월드컵 골든볼 영웅과 준우승의 새 역사를 만들어 내는 기염(氣焰)을 토했다. 이런 한국인의 저력과 용기로 거센 파도처럼 출렁이는 경제 위기를 극복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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