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 전 단양교육지원청 교육장·시인

 

[이진영 칼럼]이진영 전 단양교육지원청 교육장·시인

 글씨가 희미하여 잘 알아보지 못 할 뻔했다. 묵은 짐을 정리하다가 겉에 ‘아이들 녹음’이라는 글자와 날짜가 쓰여 있는 녹음테이프를 발견했는데 거꾸로 계산해 보니 꼭 30년 전이었다. 신기하고 반가우면서도 제대로 재생이 될까 걱정이 되어 우선 조심스레 테이프를 돌렸다. 한 바퀴를 다시 돌린 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스위치를 누르니 아이들 노랫소리가 그대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신혼 초에 당시 유행했던 전축을 하나 샀었는데 그때 마이크로 녹음을 한 것이었다. 입을 마이크에 가까이 대고는 노래를 하여 가사보다 숨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경우가 꽤 많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예쁜 노랫소리는 그 목소리 그대로 녹음되어 있었다.

감상과 추억에 젖어 노랫소리를 듣노라니 문득 어디선가 많이 듣던 목소리다. 그 어디선가 듣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이내 떠올랐다, 바로 손녀와 손자의 목소리였다. 신기하다. 어쩌면 그때의 딸과 아들의 목소리가 지금의 제 자식과 똑같을까? 그 당시의 목소리가 어린아이 때의 것이니까 지금의 손자 손녀의 나이와 비슷하므로 더 혼동할 정도로 닮은 것이다.

예전에 나와 아들의 전화 목소리를 구분하지 못하여 해프닝이 있었는데 이제 다시 아들과 손자의 목소리를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이야 당연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러 신체 부위 중 많은 부분을 쏙 빼닮는다. 부모가 원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원하지 않는다고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애당초 유전인자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씨도둑은 못 한다고 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 아이를 키우는 동안 부모의 거의 모든 것을 닮는다. 신체적인 것 외에 인생관을 닮고 가치관을 닮고 우주관을 닮고 세상을 보는 눈을 닮는다. 심지어는 영혼까지 그대로 닮는 것이니 자식은 곧 부모의 분신이고 작품이다. 30년만 닮는 게 아니고 50년, 100년도 닮는 것이고 죽어서도 닮는다.

그러니까 부모는 자식의 모든 부분에 있어 변명의 여지가 없다. 잘 되면 잘 되는 대로 잘못되면 잘못된 대로 오롯이 부모 인생의 대가이다. 소름이 돋는 일이다. ‘스승의 십 년 가르침이 열 달 어미 배 속의 태교만 못 하고 열 달 어미 배 속의 태교가 부부의 정결한 하룻밤 교합만 못 하다.’고 한다.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만나 태아가 만들어지는 것인데 그 정자 속의 유전인자는 사정되기 백일 전에 이미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부모의 유전인자는 자녀에게 절대적이다. 그러니 자녀는 당연히 부모의 분신이고 작품이며 거울인 것이다. 30년 전 자녀의 목소리와 지금의 손주 목소리가 거의 같은 이 녹음테이프는 오늘 부모의 영향력을 무섭게 실증하고 있다.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 오너라(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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