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련 사회복지사

 

[백목련] 정혜련 사회복지사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1990년대에 경험한 일본은 밉지만, 좋은 샤프펜슬, 카메라, 워크맨을 만들고, 근면성실하며, 본받고 따라잡아야할 국가였다. 일본 문구를 쓸지언정 ‘극일’, ‘반일’이 우세했던 정서에 토를 다는 친구들은 없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의 한 친구는 달랐다. 일본어와 영어를 너무 잘하고, 국제청소년클럽 멤버이자 한국대표로 활동하며, 일본에도 또래의 친구가 있던 그는 나의 절친 중 하나였다.

점심시간에 종종 벌어진 일본에 대한 짧은 토론에서 내 친구를 상대로 서너 명이 덤벼들었다. 그가 친한 친구지만, 난 정서적으로 다수의 친구 쪽에 가까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는 “이번에 일본 가서 일본 애들이랑 기모노를 입고 사진 찍었어.” “내가 기모노 입고 찍으려고 하는데 그 애들 부모님이 내가 한국 사람이라고 걱정해서 괜찮다고 했어.” 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어 그래?”라고 했으나, 속으로 멈칫했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님께서 일본군 성노예 피해 생존자로서 최초의 증언을 하셨지만, 시간이 흘러 대학교에 진학하자, 일본의 비주얼 록그룹 음악을 듣고, 애니메이션과 드라마 DVD를 구해서 보는 친구들이 있었다.

1998년 일본문화개방이 되었으나, 음성적으로 통용되던 것이 수면위에 올라왔을 뿐이다. 1999년 개봉한 일본영화 ‘러브레터’는 ‘오겡끼데스까(잘 지내나요)를 유행시켰다. 일본여행에서 친절하고 매력적인 일본친구가 가이드해 준 덕에 즐거운 추억을 만들기도 했다. 결국 문화적,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일본과 정치, 역사, 경제 분야에서 국가적으로 경험하는 일본은 그 격차가 매우 극심하며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나의 절친은 어쩌면 자신의 경험에 정직했을지 모른다. 때때로 그 친구가 들려주는 일본이야기는 지금 생각하면 매우 객관적인 부분도 있었다.

그와 논쟁을 하던 친구들이 그럼 일본문화를 거부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만난 일본인들은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나 반성 없는 일본의 우익과 정치가들의 행태는 용서하기 어렵다. 일본의 문화는 매력적이나, 2018년 기준 GDP 4배, 증시시사총액 3.8배, 세계수출시장점유율 1위 품목 3.6배를 바탕으로 자행되는 일본의 반도체 관련 제품 수출규제는 시장경제와 국제질서의 교란시키며, 국가 간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는 공감하나, 일본의 계속되는 독도와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한 망언과 후안무치(厚顔無恥)는 용인할 수 없다.

이럴 때는 역사에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구한말 소용돌이에서 개화파 친일 지식인들은 청나라세력을 물리치고자 일본을 끌어 들였다. 친청나라파(수구세력)는 권력을 위해 국가개혁을 늦추게 만들었고, 아관파천을 일으킨 친러파가 있었고, 친미파들에겐 미안하지만, 미국과 일본의 가쓰라 테프트 밀약은 일본의 대한제국 강제합병을 가능하게 했다. 원칙은 하나이다. 대한민국이 하는 모든 것은 국익에 반하지 않아야 한다. 그 과정이 험난하든, 시간이 오래 걸리든 말이다. 문화는 향유하고 평화적 교류는 하되 우리 모두는 대한민국파가 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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