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광섭 컬처디자이너·수필가

[충청의 창] 변광섭 컬처디자이너·수필가

좁고 느리다. 꾸불꾸불 주름졌다. 낡고 오래된 것들로 가득하다. 잡초들이 자라고 이름 모를 꽃들이 여기저기서 삐쭉삐쭉 입술을 내민다. 이따금 빈 집이라도 나타나면 마음이 심산하다. 그런데 왠지 정겹다. 고향냄새가 난다. 까치발을 들고 담장 너머의 낯선 풍경을 훔쳐보고 싶다. 구릿빛 노인이라도 만나면 이야기를 건네고 싶고 아이라도 있으면 함께 소꿉장난을 치고 싶다. 골목길에 들어서면 이처럼 내 마음도 낮고 느리며 유순해진다.

장소에는 혼(魂)이 서려있다. 내가 태어난 시골집에는 내 어린 시절의 추억과 마음이 담겨 있다. 다른 지역의 낮선 곳에 서면 왠지 내 본질과 다른 야릇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곳만의 혼이 내 마음을 두드리기 때문이다. 골목길은 그 마을 사람들만의 오래된 삶의 터전이다. 교역의 장소였다. 앞집 뒷집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골목길을 오가며 생노병사를 함께 했다. 그래서 골목길은 유년의 추억이자 사랑이며 그곳만의 삶의 풍경이다. 기쁨과 영광의 발걸음도 있었겠지만 시련과 슬픔의 발걸음도 있었을 것이다. 미련과 사랑과 희망의 파편들이 곳곳에 서려있다.

점과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과 선이 모여 면이 된다. 사람과 사람, 집과 집이 모여 마을이 되고 마을과 마을이 모여 공동체를 이룬다. 그곳에 길이 있다. 골목길이 있고, 물길이 있고, 들길이 있고, 숲길이 있다, 이 중에 골목길은 머무름과 다가섬이 공존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문화와 문화가 만나며, 저마다의 사연과 꿈이 만나는 곳이다. 그곳이 애틋하고 정겨우면 그리움 가득한 것도 이 때문이다.

골목길의 반대말은 신작로다. 신작로는 큰 길, 새로 난 길을 뜻한다. 신작로는 빠른 것들이 지나가는 곳이다. 근대의 상징이다. 더 빨리 지나가게 하기 위해 길을 넓히고 바닥에 아스팔트를 깐다. 잡초들도 없애고 돌부리도 없앤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옛 추억도 사라진다. 오직 빨리 이동하기 위한 통로일 뿐이다. 추억도 사랑도 없다. 그리워해야 하는 이유도 없다.

내가 살았던 고향이나 골목길의 추억이 살아지면 무엇을 기념하고 무엇을 기억하며 살까. 지금의 아파트문화 속에서는 어떤 것을 기념하고 있을까. 그리운 것은 농촌에 있다며, 농촌이 살아야 지역이 산다고 웅변하는 이유다. 그런데 지금 농촌도 벼랑 끝에 서 있다. 문명과 자본이 들어가면서 가슴 시리고 아팠던 추억도, 낡고 누추한 공간도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우리 고유의 삶과 멋이 담겨있는데 당장의 이기에 짓밟히고 있다. 도시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농촌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농촌도 치열한 전장이 돼 버렸다. 골목길이 아니라 신작도가 되어가고 있다.

골목길은 오래된 마을의 실핏줄이다. 옛 사람들의 삶의 풍경과 냄새가 깃들어 있다. 큰 길 보다 얕지만 느리고 깊다. 골목을 잃어버리면, 골목을 품지 못하면 모든 것을 잃어 버린다. 사랑도 추억도 상처도 없다. 골목길은 역사와 풍경을 담고 느림의 미학을 상징한다. 인문학적 성찰이 가능한 곳이다. 그곳만의 혼(魂)이 담겨있고 빛바랜 관습이 살아있다. 마을의 역사가 깊을수록 골목도 나이가 많다. 나이가 많은 만큼 그 흔적 또한 다채롭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골목길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도시재생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고, 정겨운 농촌의 숨결을 살려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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