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 목요사색
송양지인(宋襄之仁)과 과하지욕(袴下之辱)정우천 입시학원장
충청일보  |  webmaster@ccdaily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9.07.24  13:39:02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목요사색] 정우천 입시학원장

세상을 뜨신지 벌써 이십여 년이 지났지만, 아버지를 떠올리면 늘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교차한다. 고지식할 정도로 우직하고 정직했지만, 세상일에 요령이 부족했던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가족들을 힘들게 했다. 어린 마음에도 가난이 싫어 잘난 부모를 둔 친구를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어떨 때는 그 유능한 친구 부모의 망신스러운 추문에 다행스러워도 했던 기억도 있다. 바르고 능력도 있다면야 당연히 최고의 부모이고, 무능하며 비도덕적인 부모야 최악이다. 문제는 바르지만 무능한 부모와 비도덕적이지만 유능한 부모 중 누가 더 좋은 부모냐는 어려운 문제이다. 만약 한 국가의 지도자라면 그 선택은 또 어떨까?

전쟁터에서 예의를 지키며 상대의 형편을 봐주다 패해 목숨을 잃고 만 춘추시대의 송나라 양공을 일컫는 송양지인(宋襄之仁)이란 고사성어가 있다. 자신의 처지도 모르면서 도리나 예절을 찾다 망국에 이른 양공을 비웃는 말이다. 과하지욕(袴下之辱)이라는 또 다른 고사는 한나라 개국 공신 한신이 젊을 때 건달의 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치욕을 참아내고 큰일을 이뤘다는 의미의 성어다. 세상일에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챙길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최선이나 명분과 실리가 충돌할 때는 선택이 쉽지 않다. 개인의 입장이라면 실리를 좀 손해 보더라도 마음이 편해지는 명분을 찾을 수도 있지만, 국가적인 일이라면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해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냉혹한 국제문제에서는 그 선택에 민족의 생존과 번영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서구권에서 경멸의 의미로 쓰였던 ‘핀란드화(Finlandization)’라는 말이 있다. 핀란드가 강대국인 구소련에 대해 취했던 정책으로, 국가적 체면을 버리고 자주권마저 양보하며 실리를 취한 외교 정책을 말한다. 주변의 경멸적 평가를 받은, 그 정책으로 핀란드는 동구의 대다수 나라가 공산화로 위성국이 됐을 때 독립국을 유지했으며 지금은 높은 소득을 누리는 선진국이 되었다. 생존을 위한 외교정책에 감정을 뒤섞을 여유가 전혀 없다며, 민족적 체면과 이상주의를 버리고 실리에 충실해 오늘의 핀란드 번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일본과의 무역 분쟁으로 나라 안팎이 시끄럽다. 아마도 이 상황이 계속된다면 중국은 득을 볼 것이며, 일본은 작은 손실을 볼 것이고 우리는 큰 손실을 보게 될 것이다. 이상만 꿈꾸며 현실을 외면하는 순진한 주장은 그럴듯하고, 민족 감정에 호소하는 열정은 통쾌할 것이나 현실은 훨씬 가혹하다. 우리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성리학적 이상향의 세계를 그리며 허황한 명분만 찾다, 실용으로 무장한 외세에 굴복해 망국의 아픔을 겪은 경험이 있다. 같은 돌에 두 번 걸려 넘어진다면 돌이 문제가 아니라 넘어지는 놈이 문제다. 외교력과 정치력으로 실리를 찾아 국민을 편하게 하는 것이 위정자의 할 일이다.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욱더 강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국민의 힘을 모아 슬기롭게 이 위기를 극복한다며 우리나라는 더 강해질 것이다.

충청일보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여백
비주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