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희 수필가·전 진천군의원

 

[충청시평] 김윤희 수필가·전 진천군의원

진천-청주간 17번 국도변, 바위배기엔/ 한일 역사가 공존하는 슬픈 현장이 있다./ 무적, 번개장군 의병장 한봉수 의거비가/ 일본헌병 상등병 시마자키의 순직비와/ 엇갈린 운명으로 적과 동침하고 있다.//

1908년 한봉수 의병장은 옥성리에서/ 일본헌병 시마자키 젠지를 사살한다/ 일본은 시마자키(島岐善治)가 사살된 그 자리,/ 우리의 땅에 그의 순직비를 세워 기렸다//

1977년 문백 면민은 그 비(碑)를 끌어내리고/ ‘의병장 청암한봉수공 항일의거비’를 우뚝 세웠다/ 발치 아래로 일본군 비(碑)를 무릎 꿇린 셈이다./ 그러나 일본은 여전히 꼿꼿한 후안무치/ 또 다시 경제전쟁을 도발하고 있다.//

17번 국도를 타고 진천에서 청주로 가다보면 문백면 옥성리 국도변 나지막한 둔덕에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슬픈 역사적 현장이 있다. 무적, 번개장군 의병장 한봉수 의거비와 일본헌병 상등병 시마자키의 순직비가 한 곳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 엇갈린 운명으로 적과 동침하고 있는 역사의 증험 장이다.

명포수 의병장 한봉수는 청주 내수 태생이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의병을 모아 일본인 자산가, 친일파를 처단하며 군자금 모금 등 의병활동을 하게 된다.

1908년 6월 10일 그는, 일본 헌병 기마대의 호위로 현금 수송 우편 행랑이 진천으로 향하는 것을 알고 옥성리 비사리 고개 보리밭에 숨어 있다가 일본 헌병대를 습격하여 시마자키 젠지를 사살한다.

일본은 시마자키(島岐善治)가 사살된 바로 그 자리, 우리의 땅에 그의 순직비를 세워 기렸다. ‘陸軍憲兵 上等兵 島岐善治 殉職碑(육군헌병 상등병 도기선치 순직비)’라고 한문으로 또렷이 새긴 碑를 우리는 광복이 된 후에도 수십 년 세월 동안 그대로 안고 살아온 것이다.

1977년 문백 면민은 그 비(碑)를 뽑아내고 ‘의병장 청암한봉수공 항일의거비’를 우뚝 세워 바로 잡았다. 그리고 일본 헌병의 순직비를 한봉수 의거비 발치 아래로 끌어내려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고 있다. 무릎 꿇린 셈이다. 그러나 일본은 여전히 꼿꼿한 후안무치, 도무지 부끄러움도 반성도 모른다.

지칠 줄 모르는 전쟁 도발 야심은 어쩌면 그들이 타고난 본성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일본은 ‘수출 규제’란 명목으로 우리의 경제를 압박해 오고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 사람 대다수는 이를 ‘경제 보복’ ‘경제 전쟁’으로 여긴다. 어떤 이는 ‘신 임진왜란’ 이라고까지 한다. 여기저기서 서민들은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하며 일본 처사의 부당성을 몸으로 표현한다.

경제적 위기다. 실정이 이러한데도 정치권에서는 당리당략에 이용하며 나라를, 국민을 위하는 양 목소리를 높인다. 나라를 대신 잘 다스려 주십사 뽑아준 국회의원들은 여야를 떠나서 나라와 국민들만 바라보고 머리를 맞대야 한다.

건국 100주년, 삼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 나라를 찾기 위해 목숨 걸고 거리로 뛰쳐나온 그때의 민심을 진정 다시 한 번 헤아려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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