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정숙 수필가

[백목련] 육정숙 수필가

올 봄은 가뭄이 심했다. 시설하우스는 관주 시설이 되어있어 가뭄일지라도, 그런대로 물을 사용 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곳에서는 곡식들이 가뭄을 견뎌내느라, 또 그들을 바라보고 지켜내야 하는 농부들까지 몸과 마음이 힘들었다. 어떤 일이든 생각한대로, 마음먹은 대로, 계획한 대로 이루어진다면 가장 이상적이며 완벽하고 평화로운 삶을 이룰 수 있다. 이런 삶은 생각 속에만 존재 하지 않을지. 이를 두고 우리는 유토피아의 세상이라 말 할 수 있다.

칠월의 더위가 만만치 않다. 혹독하게 쏟아내는 태양빛을 좇아 들녘의 곡식은 어느새 벼 이삭을 세상 밖으로 밀어 올렸다. 봄 가뭄 속에 물이 모자라 힘든 모내기를 하고 돌아선지, 며칠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벼 이삭을 물고 있다. 품종마다 이삭이 올라오는 시기가 다르다. 조생종 벼는 추석 무렵에 먹을 수 있는 햅쌀이 된다. 품종이야 어떻던 힘든 상황에서도 잘 자라 이삭을 밀어 올린 벼들이 대견하다. 농부들은 농작물을 잘 키우기 위해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만 제공해주면 된다. 그리곤 기다려 주는 일이다.

자연이 일구어내는 결과물들 앞에서면, 언제나 오묘하고 신비하다. 시작과 끝의 무한 반복은 늘 새롭다. 계절이 오감에 따라 모든 것들이 변화되는 것 같지만 변하는 것은 모두 사람들에 의한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자연의 모습은 한결 같다. 오로지 한결 같음으로 끝없이 베푸는 자연이다. 그 위대함에 할 말을 잃는다. 작년에도 올해도 칠월의 뙤약볕아래서 빛과 바람과 농부의 땀으로 빚어내는 논밭에선 벼가 익어가고, 주렁주렁 달린 고추가 발갛게 익어가고 참깨도 마지막 혼신을 다해 야무지게 여물어간다. 사람들도 각자의 위치에서 그러하려니.

시간은 무릇 빨간 고추잠자리를 불러 모았다. 해거름 농로 위에서 맴맴 맴을 돈다. 먼 곳에서 매미의 축가도 들려온다. 더운 바람이 휙 지나가는 시골길로 유년시절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 시절에도 벼는 익어갔고 고추며 깨 등 햇곡식들이 오늘처럼 들녘을 꾸며 내고 있었다. 내 모습만 바뀌었다. 그 자리에 서있던 풋풋한 청년은 없고 옛일을 회상하는 중년의 시간이 멈칫멈칫 해거름녘, 긴 그림자로 서있다. 그립다. 화폭속의 한 장면 같은 유년의 시간들. 그 시절 그리운 얼굴들은 흐린 기억 속에 저장되고, 그 시간들이 흘러가는 과정 속에서 자연이 우리에게 열매를 내어주 듯, 우리도 그 시간들을 아름아름 만들어 가고 있다.

온 정성을 들이며 열매를 소중하게 키워내는 여름의 햇살과 바람은 시간을 좇아 오늘도,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각자 제 역할을 해내느라 땀을 흘리고 있다. 하지만 어지럽다. 혼돈스럽다. 풍작인데 가격이 떨어져 농민들은 울상이다. 날씨가 좋아 풍년이 들었는데 울상이라니, 풍작의 역설이다. 흉년이 들면 모자라서 문제, 풍년이 들었는데 넘쳐서 문제란다. 복잡한 세상의 구조 속에 오가는 말들 또한 넘쳐난다. 나도 고추잠자리를 따라 뱅뱅 돈다. 아들, 딸이 사라져서 온 사방을 뒤지며 찾아 헤매도 보이지 않는다. 뱅뱅 도는 잠자리를 따라 세상이 돈다. 꼬리가 빨개지도록 돌고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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