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흥 청주시 지적정보과 주무관

 

[기고] 김기흥 청주시 지적정보과 주무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토지와 집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중요하게 여겨진다. 오래전부터 농업 국가로서 토지에 작물을 심어 거기서 나온 수확물로 가족들을 부양하고 나라에 세금도 내는 농업이 전부였던 시대에 살아온 사람들에게 토지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애착을 갖고 있는 토지가 일제강점기 시대를 지나 현시점까지 오는 데까지 많은 시련과 슬픔이 서려 있다.

 
우리나라의 근대 지적제도는 대한제국시절에 계획된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전국 토지에 대한 조사와 측량을 실시해 사정과 공시 과정을 거쳐 토지대장과 지적도가 조제되는 것으로 시작됐다. 지난 1910년 3월부터 시행된 토지조사사업의 계획은 같은 해 8월 한일 강제병합으로 인해 일본인들이 전담하게 됐으며, 이로부터 양도나 공시가 근대적인 지적제도로 정비됐고, 토지경계 개념을 분명히 하기 위해 현대식 측량 공법을 통해 경계를 책정했으며, 각 토지마다 지번을 부여했다.


근대 지적제도는 수탈의 목적인 세(세금) 지적으로 시작돼 지적원도와 토지조사부가 만들어졌으며, 이를 근거로 토지대장이 만들어졌다. 토지조사사업이 끝난 후에는 임야(산)를 조사해 임야원도와 임야조사부를 만들었으며, 이를 근거로 임야대장이 만들어졌다. 이때 만들어진 문서가 최초의 지적공부라 할 수 있으며, 근대 토지 소유 개념과 지적공부 개념에 근원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지적공부를 과세(수탈)의 목적으로 토지와 임야를 각각 다른 시기와 축척을 달리해 조사하면서 지적공부의 이원화가 됐고, 일제는 우리나라의 지적도를 도입할 때 측량원점으로 세계 표준인 세계측지계를 기준으로 사용하지 않고 일본 동경원점을 기준으로 했다. 그로 인한 많은 오차, 지적도와 임야도의 축척 차이 등의 문제점이 발생했다. 또 6·25전쟁을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대다수의 지적도는 불타는 등의 이유로 소실됐고, 전후 복구에 막대한 재원이 필요했던 정부는 법령의 보안 등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못한 채 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많은 오류를 남겼다.

 
이런 여러 문제를 발생하는 지적도를 100여 년 전에 일제가 만든 자료를 근거로 사용한다는 슬픈 역사의 현실을 뒤로 한 채 현 지적제도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이렇듯 우리나라 지적제도는 오래되고 찬란했던 역사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 시대를 시작으로 많은 아픔과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나라도 그동안 경제 발전과 더불어 지적측량 및 GPS 등 기술이 빠르게 발전해 지금은 세계 어느 나라 못지않은 측량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 발전에도 불구하고 지적 측량은 예전 지적도를 기반으로 측량이 이뤄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지적불부합지 등 여러 문제들이 산적해 있고 그 해결을 위해 정부에서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앞으로 시간, 비용, 인력 등 많은 문제점이 있겠지만 여기서 멈춰 서지 말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대한민국의 토지의 정확한 지적을 향해 온 국민이 함께 이해하고 노력해주길 작은 소망을 가져본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