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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표(情表)이향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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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8.11  18:4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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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도 숨죽이는 삼복더위다. 잡초마저 머리를 푹 숙인 채 흔들거린다. '사사삭' 고라니가 내려 온 것인가. 그도 아니면 들고양이가 채마밭에 버린 생선대가리를 무는 소리인가. 두려움에 마루로 나와 서성인다. 열어 뒀던 창문을 닫고 선풍기를 켠다. 한동안 식사를 하지 못해 피골이 상접한 어머니의 약과 옷가지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머니는 움직일 때마다 몸은 휘청이며 바들거린다. 종잇장처럼 창백한 손으로 목걸이와 반지를 서랍의 종이상자에 넣어 두신다. 그걸 보면서도 가져가야 된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동네 어르신들을 의심하지 않았고 외부인이 마을로 들어 올수도 있다는 상상도 못했다. 

아니 이 모든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섣부른 판단으로 어머니의 심장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목걸이와 젊은 시절 지아비가 해준 반지를 잃어 버렸다.

이십 여일 만에 돌아온 집은 떠나던 날과 같이 잘 정돈돼 있었다. 단지 마루 쪽 창문틀에 먼지가 쌓여 있었고 요양센터에서 보내온 우편물이 마루에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서랍을 열어 종이상자부터 확인했다. 금붙이가 보이지 않는다.

겨우 기력을 찾은 어머니와 온 집안을 다 뒤졌다. 허망함과 분노 사이에서 자책하는 내게 사람이 다치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오히려 위로하신다. 그른 일이 지나간 자리로 좋은 일이 올 것이니 마음 상하지 말자 하신다. 

우리나라가 금융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시민들은 하나로 뭉쳤다. 스스로 일어나 금 모으기 운동을 했었다. 

마침 큰아이의 첫 생일에 금반지 선물을 받았다. 장롱에 넣어 두느니 나라에도 도움이 되고 아이 명의로 통장을 만들기로 했다. 생각만 앞서고 매장을 비울 수 없어 차일피일 했다. 큰 맘 먹고 남편과 다음 날로 간신히 시간을 맞췄다. 

헌데 저녁 나절 집에 들르니 개판 오분 전이었다. 벌건 대낮에 도둑이 든 것이다. 문단속을 단단히 했는 데도 보안 창을 뜯어내고 들어왔다. 온 집안을 뒤집어 놓고 방마다 산더미처럼 물건을 쌓아뒀다. 경찰에 신고를 했다. 이웃의 네 집이나 피해를 보았단다. 그날부터 잠을 편히 잘 수 없었다. 누군가 집안으로 들어설 것만 같아 바람소리만 들려도 벌떡 일어났다. 

누구를 탓하고 원망하는 것은 어머니가 원하지 않으신다. 귀한 물건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내가 우선 죄인이다. 누군가에게 죄를 짓는 기회를 줬기 때문이다. 도둑 또한 순간의 물욕을 참지 못 하고 남의 것을 탐했으니 설사 어머니가 용서하더라도 그의 인생에서 합당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더구나 구순 노인의 먼저 가신 지아비의 정표인 패물을 훔쳐 내었으니 천형을 면치 못 하리라. 나도 모르게 저주를 뿜어낸다. 자식 앞이라 대범한 척 하셨지만 홀로 이집을 지키시면서 행여 두려움은 없을까. 허전함은 또 어찌 감당하실까.

사립문 밖으로 나간 이웃에 대한 믿음은 어디 가서 찾을까. 세월이 흘러 지아비를 만나면 정표를 지켜내지 못 한 당신은 대역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실 것이다.

오늘따라 달빛이 창백하다. 지난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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