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희 보은교육지원청 장학사

 

[박병희 보은교육지원청 장학사 ] 요즈음 우리나라 대법원의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개인의 배상 판결을 문제 삼아, 일본이 무역보복으로 맞서자 국민들 사이에서 일본 제품에 대한 불매 운동이 한창이다. 의외로 주변의 젊은 교사나 주무관, 동네 슈퍼 주인 등이 일본 제품 불매 운동에 앞장서며 일본 자회사가 거느린 제3국의 맥주회사까지 분석하고 알려주는 것을 보며 더욱 놀라고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전범기업으로 미쯔비시 재벌 그룹이 있다. 해저탄광 군함도 사례로 많이 알려진 일본 광업회사로 석탄사업과 조선소를 기반으로 거대 재벌로 발전한 전범기업이다. 지금은 볼펜에서부터 엘리베이터까지 다양한 제품을 만드는 중공업 재벌로 우리가 많이 쓰는 ‘제트스트림’이라는 품질 좋은 볼펜도 만든다. 사실은 내가 사는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미쯔비시 제품이다. 무의식적으로 타고 오르내리지만 이 기업이 전범기업이라는 사실을 잊은 적은 없다. 그리고 쓸데없이 불편해한다. 아마도 불편함으로 그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항상 누군가는 힘든 경제상황을 이겨내고 미래의 번영을 위해 국력을 낭비하는 과거의 집착에서 벗어나자고 말한다. 하지만 미래는 어디에서 오는가? ‘금 나와라, 뚝딱!’ 하늘에서 떨어지는 금덩어리인가? 아니다, 미래는 한겨울 함박눈처럼 수많은 과거가 쌓이고 쌓여서 온 세상을 하얗게 덮듯이 오는 것이다. 과거 즉 역사를 바로세우지 않으면, 되돌아보고 성찰하지 않으면, 미래의 번영과 정의는 절대로 오지 않는다. 역사를 성찰하여 과거를 바로잡지 않고 미래의 번영을 노래하는 것은 궤변인 것이다.

역사에 대한 반성 없이 적반하장의 태도로 무역보복으로 일관하는 일본의 태도에 분개하며, 우리 보은 지역 동학농민전쟁을 살펴보면 일본의 우리 민족 학살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가장 가까운 근대사로 거슬러 올라가면 갑오동학농민전쟁이 있다.

동학농민전쟁은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민란에서 비롯되어 12월 충청도 보은 북실전투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보은 북실전투는 말이 전투지 약 2,600여명의 북접 농민군에 대한 일본군의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이후, 북접 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의 추격, 그리고 한겨울의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전투의지가 꺾인 상태에서 북접 지도부의 탈출을 돕기 위해 처절하게 저항한 것이다.

하지만 북실전투의 농민군 학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시산혈해(屍山血海)라는 과장되었지만, 결코 참혹함이 과장되지 않은 말로 전해질 뿐이다. 전라도 남부지역 농민군에 대한 학살 기록을 보면 일본군의 잔인함에 소름이 돋고 가슴이 먹먹해질 뿐이다.

일본군은 볏가리와 총검 등을 이용하여 농민군을 잔인하게 대량 학살(제노사이드)한 것이다. 한 가지 사례를 들면, 일본군은 농민군의 무릎을 꿇리고 손을 뒤로 못 움직이게 묶은 뒤, 볏가리를 씌워 불을 붙여 태워 죽였다. 보국안민, 척왜척양을 위해 의롭게 일어섰던 농민군들은 충청도 전라도 산하를 붉게 물들이며 일본군에 의해 잔인하게 대량학살당한 것이다.

보은 북실전투 학살의 역사는 기록물이 거의 없는데다 후손에게까지 잊히고 있어 있으며, 유적지가 많이 훼손되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반성 없는 후안무치한 태도에 일본제품 불매운동으로만 맞설 것인가? 무역보복이 끝나면 모든 과거는 묻히고 다시 평화롭게 잘 지내면 되는 것인가?

우리는 일본의 이러한 만행을 잊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잊히고 있는 우리 지역의 아픈 역사 현장부터 보존하여, 교육적으로 활용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는 이러한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보국안민과 척왜척양을 외치며 쓰러져간 갑오년의 농민군들의 얼을, 후손들 가슴에 새겨줘야 하지 않을까?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