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이광 (李光·1879년~1966년)

 


호는 성암… 충북 청주 출신
신민회 가입해 주권수호운동
만주서 경학사·신흥학교 설립
1912년 상해서 동제사 가입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 선출
'조선지혈'에서 기자로 활동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충청일보 배명식기자] 이광 선생(사진)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의원, 임시정부 북경주재외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다. 

호는 성암(星巖)으로 충북 청주 출신이다. 1894년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에 입학했으며, 1904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 

1905년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 서울 상동(尙洞)의 공옥학교(攻玉學校) 교사로 취임해 청소년 교육에 노력했다.

1907년 전덕기(全德基)·이동녕(李東寧)·양기탁(梁起鐸)·이회영(李會榮) 등이 주도하는 애국계몽단체인 신민회(新民會)에 가입, 주권수호운동을 펼쳤다. 

1910년 일제에게 주권이 강탈당하자 공옥학교를 사직하고 만주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이시영(李始榮)과 같이 교민의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와 독립운동 인재를 양성할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해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 일대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했다.

1912년 중국 상해에 가서 신규식(申圭植)이 주도하는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했으며, 난징(南京)의 민국대학(民國大學)에 입학해 1916년에 졸업했다.

1919년 2월에는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 대표 39명 중 1인으로 참가해 서명하기도 했다. 

같은 해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많은 애국지사들이 상하이로 집결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임시의정원을 설립했는데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로 선출돼 임시정부 설립을 도왔다. 

1921년 12월 임시정부 외무부의 북경주재외무위원으로 임명돼 한중 양국의 외교연락 업무를 담당하며 교민들의 거주권 확보, 생활안정 등 교민 생계를 보호했다. 

1930년 북경에서 북경에서 박용태 등과 대한대독립당주비회를 결성하고 기관지 '조선지혈(朝鮮之血)'을 발행했는데 선생은 기자로 활동했다. 

'조선지혈'은 주로 북경과 텐진을 비롯한 국내외 소식과 일제의 침략상을 비판하고 독립을 위해서 민족이 단결해 대항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1932년 난징에서 각 단체 연합체인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고 간부가 돼 선전활동을 펼쳤다. 

1938년에는 임시정부의 후난성(湖南省) 외교연락대표로 활동했다.

1944년 3월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당원으로서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했다.

1945년 광복 이후 임시정부 화북 선무단장(華北宣撫團長)으로 화북지방 재류교포의 귀국사무를 맡아 보았다. 

그 뒤 귀국해 충북도지사·감찰위원회위원장·체신부장관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017년 11월 숙환(폐렴)으로 별세하신 항일투사 이윤철 광복군 지사가 이광 선생의 아들이다. 

이광이 민족대표 39명 중 1명으로 참여해 서명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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