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천 입시학원장

 

[정우천 입시학원장] 소멸하고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기억은 그리움이 되고 추억이 된다. 어머니를 뵈러 고향에 들렀다가 마침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라 장터를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잊고 있었던 오래전의 기억은 그리움으로 되살아나고, 지나가 버린 날들에 대한 자각은 아쉬움이 되어 기억을 일깨운다. 시골장의 풍경은 시대를 거슬러 아날로그적 감성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다. 상거래 기능의 대부분이 대형마트와 인터넷 상거래로 넘어가고 물물 교환 형식의 재래식 장터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데, 그래도 꽤 북적이는 오일장의 소란스러움이 정겹다.

천정에 닿을 듯 높은 진열대에 위압적으로 상품이 진열된 대형마트에 비해, 오일장은 수평적으로 바닥에 늘어놓은 노점상들의 집합이라 더 인간적이다. 이제 장터를 오가는 사람들은 고향을 지키는 나이 든 이들과 동남아에서 시집온 젊은 아낙들 그리고 일자리를 얻기 위해 먼 타국에서 온 피부색 다른 젊은이들로 바뀌었다. 거래되는 상품도 달라졌고, 시장을 채우는 사람들도 바뀌었지만, 오일장이 주는 흥겨운 분위기와 기분 좋은 어수선함은 어릴 적 고향장터의 기본을 떠올려 준다.

예전 어른들은 장이 열리지 않는 날을 무싯날이라 불렀다. 이제야 그 무싯날(無市日)이 시장이 열리지 않아 한가롭고 따분한 날이란 뜻이라 이해하게 됐다. 어쩌면 오일장은 스마트폰으로 소통되는 SNS의 아날로그적 맞대면 버전이라 수도 있으니 결국 삶의 풍요로움은 사람 간 소통의 문제다. 오일장 구경을 끝내고 90년대에야 4차선으로 확장된 36번 국도를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파장 후의 달구지 지나가던 달빛 환한 신작로 길은 이제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달빛 아래 그림자 드리우던 포플러 가로수 길도 사라져 버린 옛일이 돼버렸다. 10대 중반 고향을 떠났으니, 그곳의 날들은 겨우 십수 년에 불과하고 그 후 살아온 곳이 훨씬 익숙하고 고향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도 내 생각은 고집스럽게도 유년기를 보낸 그곳만을 고향이라 기억하고 추억한다.

병아리나 새끼 오리들은 맨 처음 본 물체를 어미라 생각하고, 그 물체를 쫓아다닌다고 하며 이를 ‘각인효과’라고 한다. 동물 행동학자들은 동물 뇌의 특징으로 유아기의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라는 것을 말한다. 조류의 결정적 시기는 태어난 지 2~3시간이고 동물에 따라 다르나 인간은 생후 12년 정도라고 한다. 그때 배운 것은 그 시기가 지나도 잘 잊히지 않고, 다른 것들로 대체되지도 않는다고 한다. 결국 인간은 뇌의 큰 신경망이 형성되고 완성되는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까지의 기억이 평생 마음속에 각인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년기에 거주했던 곳을 평생 고향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고향은 단지 지도위의 어떤 지점으로 표시되는 지리적 특성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지리적 위치가 이제는 갈 수 없는 어떤 시점과 결합하여 만들어 내는 특별한 감성이다. 기억이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바래면 전설이 된다는데, 유년의 추억이 삶에 바래면 그리운 고향이 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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