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수필가

 

[이향숙 수필가] 홍수다. 대 재앙이다. 타일 바닥에 눕혀져 질겅질겅 밟힌다. 살갗이 갈기갈기 찢겨 질것만 같다. 아랑곳없이 발목을 잡고 위아래로 탕탕 친다. 얼굴이건 목이건 사정없이 짓밟더니 호수의 끝자락으로 물을 쏘아댄다. 이렇게 죽는구나 싶은데 번쩍 들어 덜렁거리며 저벅저벅 걷는다.

이제 고문이 끝났나 보다. 고진감래라더니 고통을 잊으려 눈을 감았다. 순간 바닥의 섬뜩한 느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오래된 인공대리석에 볼 따귀를 치대기 시작한다. 성에 차지 않는지 아예 구둣발로 힘을 주어 밀기를 반복한다. 언제쯤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있을까. 틀니까지 빠진 노파를 몸 위에 얹어 놓고 이리저리 세상의 거친 맛만 보여준다.

이집에 처음 왔을 적엔 얼굴과 머리밖에 없었다. 주인이 뽀송뽀송함에 반하였는지 몸을 만들어 주었다. 민간인의 옷으로 갈아입지도 못한 갓 군복무를 마친 청년이었다. 무엇보다 탄탄한 근육이 좋았다. 진열대에 눈부신 청춘의 모습으로 서 있는 기분은 웬만한 이들은 평생 느껴보지 못할 일이다. 하지만 비교도 되지 않는 옆자리의 못난이들이 반려자를 만나 떠나건만 어찌된 일인지 나는 좀처럼 선택이 되지 않는다.

자리를 오래 차지하고 있는 것은 주인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저만치 사람들이 보이면 머리부터 점검하고 섹시한 자세를 취해 본다. 최고의 모델들을 떠올리며 흉내 내는 것이다. 그러면 번쩍 들어 이리저리 구경하고 비닐 옷을 입고 있는 놈을 데려간다. 가당치도 않아 목청을 돋우어 그를 불러 본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을 대하듯이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제 볼일만 보고 사라진다.

끊임없이 갈구 하였건만 이루어지지 않을 적엔 자존감이 떨어지고 우울해 진다. 이웃을 탓하고 신을 원망하며 나에게만 가혹한지 따져 묻는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다. 자포자기 했다. 축 늘어져 서 있을 힘도 없을 때쯤 이었다. 인상 좋은 주인이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이다. 눈빛도 처음 만났을 때의 반짝임은 어디로 가고 썩은 동태눈이 꼭 이럴 것만 같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세월도 어느새 두어 해는 지났는가. 지조 있는 이라도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골목 끝에 큰 거울이 있다. 왜 그것을 들여다볼 생각을 못했을까. 앉아있는 주인의 등이 보이고 머리가 누렇게 퇴색된 누군가의 모습이 보인다. 빛바랜 옷이 닳아서 뜯겨져 나갔다. 속살이 다 보인다. 순간 주저앉을 뻔 했다. 부정하고 싶지만 나의 모습이다. 주인의 손이 움직일 적마다 몸이 흔들린다.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소리 내어 통곡한다. 그때부터 고난은 시작되었다.

뽀얀 행주로 태어났더라면, 안방을 훔쳐내는 걸레이었으면, 갓난아기의 기저귀어도 나쁘지 않지만 사랑하는 이의 눈물을 닦아내는 곱게 수놓은 손수건으로의 삶을 꿈꾸어 본다. 하지만 이번 생은 닳고 닳아지면 지옥 불에 떨어지거나 오랜 세월이 흘러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다음 生도 낮은 곳에서 더 낮은 곳을 향하여 고통과 바꾸어 세상을 사랑하는 大걸레로 환생 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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