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자 수필가

 

[충청칼럼] 한옥자 수필가

펌프킨(Pumpkin)이란 글씨와 그릇에 담긴 노란색 음식을 보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호박죽이라고 단정한 적이 있다. 사진 속 음식은 아무리 봐도 호박죽이었다. 여행 동행인 아들도 그렇다고 했다.

남의 나라에 여행 가면 음식점 입구나 메뉴판에서 사진을 보며 음식을 선택해야 한다. 당시 나는 매우 신중하게 음식을 골라도 매번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어느 것은 너무 느끼해 비위가 상했고 또 어느 것은 음식에서 나는 향 때문에 음식을 먹기도 전에 구역질을 참아야 할 만큼 먹는 고통에 시달렸다. 이런 지경이라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 나날이 사위어 가던 차에 사진을 보고 문득 즐겨 먹던 호박죽을 떠올리게 되었다.

음식점은 제법 이름난 곳이라 손님이 많았다. 손님수가 많은 만큼 음식도 더디게 왔다. 마침내 주문한 음식이 식탁에 올라왔을 때, 미리 들고 있던 스푼 가득 음식을 떠 허겁지겁 입안에 넣었다. 그러나 입안으로 들어간 음식은 혀를 괴롭히고 코를 자극했다. 곧바로 화장실로 직행하게 만들었다.

결국 모처럼 기대했던 저녁 식사도 실패로 끝났다. 감히 타국에서 가을볕을 머금어 둥실해진 노란 호박을 갈라 끓인 호박죽을 기대했으니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그만큼 허기가 심했고 그것이라도 먹으면 기운을 차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앞서서 말도 안 되는 기대를 가졌고 한 번 작정하니 누가 뭐래도 그것은 호박죽이라고 믿게 되었다.

풋내와 정체 모를 향신료가 뒤범벅된 수프가 준 상실감은 컸다. 지금도 호박죽만 보면 그날의 진절머리 치던 맛을 잊지 못한다. 푸른 호박으로 만든 음식을 호박죽으로 착각하게 만든 것은 노란색이었다. 아직도 노란색의 정체를 모른다. 카레가루나 강황가루 정도라면 그렇게 기겁을 했을 리는 없다.

작정하면 못할 일이 없다고 한다. 이 말은 긍정적으로 보자면 바람직하나 부정적인 측면으로 보면 위험한 말이다. 좋은 작정이란 나를 희생해서 긍정적 결과를 얻는 일이지만 나쁜 작정은 남을 해코지하여 내 욕심을 차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최근 자기 욕심을 차리는 나쁜 작정을 보고 있다. 가족을 괴롭히고 심지어 어린 자식까지 작정의 도구로 삼아 마구 난도질을 한다. 아무리 목적에 눈이 멀어도 그렇지 남을 울리면 본인은 피눈물이 난다는 말을 그들은 모른단 말인가.

모를 리 없다. 다만 절박한 것이다. 절박하다 보니 물이고 불이고 가리지 못하고 아무것이나 마구잡이로 붙잡고 늘어지기로 작정한 것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상대적 박탈감을 운운하며 나쁜 작정에 함부로 휘말리는 여론이다.

법무부 장관 임명 건과 관계해서 연일 벌어지는 각종 해프닝을 본다. 증거 하나 없고 의혹만 가득한 기사를 보면서 그들이 남을 괴롭혀 울리려고 작정한 사람들로 보인다. 부정도 여론을 조장하는 사람들도 펌프킨이란 글씨에 속고 색깔에 속았던 나와 같다.

아이들 싸움은 치사한 원칙이 있다. 상대에게 괴로움을 선사하여 먼저 울리려고 애쓴다. 못된 무리를 모아 괴롭히는 놀이를 일삼으며 나중에는 발뺌과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한다. 이들의 싸움 원칙은 누가 먼저 우느냐가 관건이라 그렇다. 누가 무릎을 꿇을지 두고 볼 일이다. 말과 글을 속이고 거짓 여론몰이를 일삼는 무리들도 정체모를 수프의 된 맛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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