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황학수 (黃學秀·1877년 7월 20일~1953년 3월 12일)

 

1894년 스스로 동학군 참가
1898년 육군무관학교 입학해
각종 군사 기관서 장교로 활동
1909년 부명학교서 인재 육성
군무부 참사로 독립군 양성
광복군서 활동하며 항일전 지휘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충청일보 배명식기자]  황학수 선생은 대한제국 군인, 만주 독립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등 한평생을 조국의 독립에 몸 바친 '참군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호는 몽호(夢呼)이며, 1879년 서울 화동에서 출생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1884년 충북도 단양군 어상천면 대전리 삼화동으로 내려와 살게 됐다. 

삼화동은 행정 구역으로는 단양군에 속해 있지만 생활권은 제천이었다. 

선생은 제천을 고향으로 여겼으며 제천과의 연고로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됐다. 광복 후에도 여생을 제천에서 보냈다. 

황학수는 16살 때인 1894년 전라도 지역에서 일어난 동학 농민군의 봉기가 제천에도 휘몰아치자 스스로 동학군에 참가했다. 1895년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이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서울로 올라왔다. 

1898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1900년 무관학교를 졸업했다. 

육군 참위로 임명돼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당할 때까지 7년 반 동안 각종 군사 기관에서 장교로 활동했다.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자 황학수는 군복을 벗어던지고 제천으로 내려갔다. 

이곳 유지들과 함께 1909년 부명학교(1911년 제천공립보통학교로 개창, 1945년 동명학교로 개칭)를 설립하고 인재 육성에 전념했다.

육군무관학교 동기생들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동기생들 중 상당수가 만주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과 그곳이 지리적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적합하다는 말을 듣고 망명했다. 

상하이까지 간 황학수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해 임시 의정원의 충청도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1919년 11월 군무부 참사로 임명된 이래 주로 군무부의 일을 맡거나 육군무관학교 교관으로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일을 했다. 

서간도에서는 서로 군정서의 군사 조직을 재건하고 참모장과 군무부장으로 활동했으며, 이어 북만주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 운동 단체인 신민부에서 참모부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30년 한국 독립당을 결성하고 부위원장이 됐으며 한국 독립당 직속으로 한국 독립군이 조직되자 1932년 부사령관이 돼 중국군과 연합해 일본군과 싸운 전투에서 여러 차례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중국군의 오해로 한국 독립군이 무장 해제당해 더 이상 활동하기가 어렵게 되자 만주를 떠나 중국 본토로 들어갔다. 

그는 난징(남경)에서 지청천 등과 함께 조선 혁명당에 참가했으며, 1938년 5월 조선 혁명당, 한국 독립당, 한국 국민당의 3당 통합 회의가 개최되자 지청천 등과 함께 조선 혁명당 대표로 참석해 민족 혁명당을 창당하는데 기여했다.

다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찾은 황학수는 1938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사위원을 지내고, 1939년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특파원으로 시안(서안)에서 의용군을 모집했다. 

의용군을 바탕으로 1940년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광복군 총사령 대리로서 시안 총사령부의 최고 책임자로 활동하며 항일전을 지휘했다.

1940년 11월에 시안으로 이전했던 광복군 총사령부가 1942년 10월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있던 충칭으로 옮겨가자 황학수 또한 충칭으로 갔다. 

황학수는 임시 정부의 국무위원과 생계부장으로 선출됐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군인에서 정치인으로 바뀌게 되는데, 황학수는 생계부장 이외에 한국 독립당의 주요 간부로도 활동했다

1945년 해방 후 귀국해 임시 정부와 한국 독립당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대종교에도 관여하다가 1953년 사망했다. 

황학수 선생은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독립군을 거쳐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활동했던 유일한 인물이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국가보훈처에서는 2013년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 서울현충원의 황학수 묘.

 

▲ 광복군 총사령부 서안 판사처 직원들과 황학수(앞줄 왼쪽 세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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