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한봉수 (韓鳳洙·1883년 4월 18일~1972년 12월 25일)

 

대한제국군 진위대 상등병 복무
1907년 군대 해산 후 의병 활약
친일파 처단·무기노획 등 투쟁
 공주재판서 교수형 선고됐으나
경술국치 '합방대사령'에 석방
1919년 세교리 장터서 만세시위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충청일보 배명식기자]  1907년 후기의병에 참전해 뛰어난 전공을 쌓았고 1919년 3·1운동 당시 고향인 충북도 청원군 북일면(현 청주시 내수읍)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한봉수 의병장은 어려서부터 사격과 사냥에 남다른 자질이 있었다고 한다. 

자질을 살려 대한제국군 진위대 상등병으로 복무하다가 1907년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그 해 9월 해산군인 출신인 김규환(金奎煥)과 함께 의병으로 봉기, 일군 수비대 및 헌병대를 습격하는 등 활약했다.

1910년 2월까지 2년 반에 걸쳐 모두 26회의 활발한 투쟁을 펼쳤다. 

그의 투쟁 유형은 일본인 자산가와 친일파 처단, 밀정과 변절자 처단, 일본군과 교전, 우편행랑 습격과 군자금·무기노획 등 다양했다. 

주로 고향인 가는다리(세교리)와 초정 및 괴산, 진천 등지에서 활동했다. 

6차례에 걸쳐 우편행랑을 공격하는 투쟁을 벌여 모두 성공했다.

노획한 현금을 군자금으로 활용하고 지역 주민들에게 분배해 민중적 기반을 확보했다. 

1908년 6월에는 운편행랑을 호위하던 일본 헌병 시마자키를 처단했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가 이곳에 헌병 순직비를 세웠으나 1977년 진천 문백면민들이 성금을 모아 그 비를 끌어내리고 한봉수 의병장을 기리는 '의병장 청암한봉수공 항일의거비'를 세웠다. 

1909년 일제의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의병 세력이 크게 위축됐고 한봉수도 1910년 대부분의 부하를 잃고 피신생활을 했다. 

이후 일제에 체포돼 6월 29일 공주재판소 청주지부에서 내란죄 수범으로 최고형인 교수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경술국치가 이뤄짐에 따라 이른바 '합방대사령'으로 석방됐다. 

1919년 고종황제의 인산배관(因山拜觀)차 상경했다가 홍명희·손병희 등과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했으며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했다. 4월 1일 세교리 장터에서 면민, 내수보통학교생과 함께 만세시위를 펼쳤다. 

결국 일제에 체포돼 5월 6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충북 청주시 상당공원에는 그의 동상이, 중앙공원에는 송덕비가 있다.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학평리에는 청암 한봉수 의병장 유허지가 있다. <끝> 

 

▲ 청암 한봉수 의병장 사적지(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학평리 85-4번지).

 

▲ 한봉수 의거비. 왼쪽 아래 작은 비석이 일본군 헌병 순직비

 

▲ 한봉수 의병장 동상.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