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가부장적 전통' 중시→2000년대 "일방적 희생 안 돼"

추석 연휴는 모처럼 만난 가족·친지와 회포를 푸는 즐거운 시간이기도 하지만 차례 준비, 손님 대접 등으로 정신없이 일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지치는 고통의 순간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명절 후유증'도 상당하다.

그중 하나가 부부싸움과 이혼이다.

사소한 말다툼이 시댁과 친정을 둘러싼 감정싸움으로 번지다 보면 이혼을 고려하는 부부가 늘어난다.

14일 통계청의 '최근 5년간 이혼 통계'를 보면 설과 추석 명절 직후인 2∼3월과 10∼11월의 이혼 건수가 바로 직전 달보다 평균 11.5%나 많다.

그러면 명절에서 비롯된 갈등이 이혼 사유가 될까.

시대의 흐름에 따라 법원의 판단 역시 변화가 뚜렷하다.

1990대에는 가부장적 관념 아래 여성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며느리가 명절에 시댁 찾기를 꺼리는 것을 두고 전통적인 예의범절을 무시했다며 이혼 사유로 인정한 판례도 있다.

1994년 7월 결혼 14년 차 A씨는 아내 B씨가 맞벌이를 이유로 시부모를 소홀히 대한다며 이혼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재판을 맡은 서울가정법원 가사3부는 "B씨가 전통적인 며느리의 역할을 소홀히 해 가정불화가 야기된 점이 인정된다"며 A씨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맏며느리인 B씨가 결혼 이후 시부모의 생신이나 명절에 시댁을 제대로 찾지도 않는 등 전통적인 윤리의식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부 사이에 '일방적인 희생'은 없다는 점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2003년 5월 대전지법 가사단독부는 "시댁 식구들에게 극도로 인색하고 남편에게 포악한 처신을 일삼는다"며 C씨가 아내 D씨를 상대로 낸 이혼 청구 소송에서 원고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C씨는 D씨에게 시댁에 대한 일방적 양보와 희생을 강요했으며 불만을 폭력으로 해소하는 등 배우자로서 신의를 저버린 만큼 불화의 주된 책임은 원고에게 있다"고 기각 사유를 밝혔다.

최근 수년 사이에는 남편과 부인이 동등한 위치에서 책임과 의무를 다했는지 면밀히 따지는 추세로 판결이 변화했다.

2004년 결혼한 E씨는 아내가 시댁 가족을 친정 식구처럼 성심껏 대하지 않는 것에, 반대로 F씨는 가부장적인 남편이 시댁에 대한 의무만을 강조하는 것에 서로 불만을 품게 됐다.

그러던 중 2010년 설날 시댁에서 제사 음식을 준비하던 F씨가 미끄러져 허리를 다쳤다. 하지만 시댁 식구들이 걱정은커녕 일도 도와주지 않자 F씨가 시누이, 시아버지와 말다툼을 벌이고 이튿날 서울 집으로 혼자 돌아와 버렸다.

이들의 부부 싸움은 양가의 집안싸움으로 번졌고, 급기야 E씨는 F씨를 상대로 이혼과 위자료 1천만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F씨는 거꾸로 이혼과 위자료 5천만원을 청구하는 반소를 각각 제기했다.

그러나 서울가정법원은 '부부가 똑같이 책임이 있다'며 양측의 위자료 요구는 모두 기각했다.

재판부는 "E씨는 시댁에 대한 의무만 강요하면서 친가 식구와 함께 F씨를 타박했고, F씨는 반감으로 시댁 식구들을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시아버지에게 대들기까지 했다"며 "남편과 아내 모두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고 꾸짖었다.

임경숙 법무법인 산우 변호사는 "일반적인 명절 스트레스만으로는 법정 이혼 사유로 인정받기 어려우나, 폭행 또는 오랜 기간 참을 수 없을 정도의 모욕이나 괴롭힘 등 배우자나 그 가족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실이 입증되면 이혼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모두가 즐거워야 할 명절에 오해나 갈등으로 이혼을 선택한다면 큰 후회가 남을 수 있다"며 "이혼을 신청하기에 앞서 제3자와 상담하거나 부부가 진솔한 대화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갈등을 해결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