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천 입시학원장

 

[목요사색] 정우천 입시학원장

창문을 넘어온 시원한 공기가 기분 좋게 피부를 간지럽히는 가을 아침이다. 베란다에는 햇볕을 받으며 졸고 있는 고양이가 나른한 몸짓으로 무소유의 삶을 즐기고 있다. 느슨한 편안함에 압력밥솥 추 흔들리는 소리가 보태지니, 평온한 휴일 아침이 완성되는 느낌이다. 자극적이지도 짜릿하지도 않은 김빠진 밥솥같이 밋밋한 날들이야말로 진정 행복한 날들이다.

가마솥, 양은 솥을 거쳐 전기밥솥이 한 시대를 풍미하더니 이제는 압력밥솥이 대세다. 동력원이 바뀌었을 뿐 밥 짓는 방법이 처음의 가마솥 방식으로 돌아갔다. 레트로(retro)가 유행인 시대이니 밥 짓는 기술도 복고풍이다. 가정용 압력솥은 1679년 물리학자 드니 파팽이 발명한 증기 찜통이 시초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전통 가마솥의 원리가 가미돼 만들어졌다고 한다.

물은 보통 100℃에서 끓고 그 온도에서 음식이 조리된다. 그러나 기압이 낮으면 100℃ 이하에서 물이 끓고, 기압이 높으면 100℃보다 높은 온도에서 물이 끓는다. 기압이 낮은 높은 산에서 음식이 잘 안 되는 이유다. 압력밥솥은 솥 속의 증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해 압력을 높인 것이다. 이렇게 하면 끓는점이 높아져 음식이 쉽게 익고, 요리 시간이 짧아져 영양분의 손실을 최소한으로 할 수 있다.

압력밥솥은 대기압보다 높은 1.2기압 정도로 압력을 높여 물이 약 120℃에서 끓게 한다. 하지만 밥솥의 압력이 계속 높아지면 솥은 폭파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장치가 뚜껑 위쪽에 있는 압력 추이다. 솥 속의 증기압이 압력추가 누르는 힘보다 크면 구멍이 열려서 증기를 방출해 안전하게 된다. 압력솥은 이 추가 압력을 적당히 조절해줘 안전하기도 하고 음식 맛도 좋게 만든다.

국가 운영의 시스템에도 이런 밥솥의 추처럼, 압력을 적당히 조절하고 안전하게 하는 장치가 있다. 민심이 들끓고 여론이 폭발하려 할 때 이를 적절히 조절하고 해소하지 않으면 국가가 위태로워진다. 이러한 국민적 압력이 적당히 해소되지 않아 혁명이나 폭동으로 세상이 뒤집어진 역사적 사례도 적지 않다. 최근 종종 뉴스에 등장하는 청와대 청원게시판도 이러한 여론을 반영하는 압력 추의 하나일 것 같다.

압력추가 제대로 작동해야 솥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듯, 추가 불량하여 제멋대로 작동한다면 안전하지도 않고 맛있는 음식이 조리될 수도 없다. 게시판의 황당한 게시물로는 연예인 누구를 사형시켜라, 해체한 아이돌을 재결합 해달라, 롱패딩은 키 큰 사람만 입도록 하라는 등 엉뚱하고, 인신공격성인 게시물도 있다고 한다. 게시판에 본래의 취지가 무색할 엉뚱한 청원이 난무한다던가, 자신들의 무리한 정치적 주장을 위한 도구로 쓰인다면 이것은 불량한 압력 추와 다를 바 없다.

여기저기 증기가 새는 불량 압력밥솥의 패킹과 불량 추를 방치한다면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없으며, 자칫하면 압력솥의 폭발로 위험할 수도 있다. 제대로 된 압력추가 필요하듯 청원게시판도 제대로 작동할 수 있게 관리해야 할 것 같다. 불량 압력 추에 의존하는 밥솥은 위험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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