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표 서원대 교수

[내일을 열며] 이광표 서원대 교수

국보 101호 원주 법천사 지광국사탑(法泉寺智光國師塔〮, 1070년경)이 머지않아 고향 원주로 돌아가게 됐다. 100여 년 만이다. 하지만 귀향이 그리 순탄하지는 않은 것 같다. 원래 자리인 법천사 터 야외로 돌아가느냐, 좀 떨어진 유적전시관(건립 예정) 실내로 들어가느냐를 놓고, 관계 당국이 고민에 빠졌기 때문이다.

지광국사탑은 애초 국보 59호 지광국사탑비(1085년)와 함께 원주 법천사에 있었다. 지광국사탑은 고려 승려 지광국사의 사리를 안치한 승탑이고, 지광국사탑비는 그의 공적을 기록한 석비다. 승탑의 사연은 이렇다.

1911년 가을, 한 일본인(A)이 법천사 터에 있던 지광국사탑을 한 주민에게서 사들였다. A는 곧바로 서울에 사는 일본인 부호(B)에게 팔았다. B는 서울 명동의 한 병원으로 옮긴 뒤 1912년 자신의 집 정원으로 다시 옮겼다. 이어 B는 일본 오사카의 또다른 일본인(C)에게 넘겼고 C는 같은 해 이 탑을 오사카로 반출했다. 소식을 접한 조선총독부는 “지광국사탑은 국유지 안에 있는 것이니 반환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1915년경 B는 오사카로 건너가 C로부터 지광국사탑을 다시 사들인 뒤 총독부에 헌납했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저들이 사고 팔고, 돌려받고, 한 것이다. 모두 불법 약탈이었다.

천만다행 지광국사탑은 돌아왔으나, 이 탑이 자리잡은 곳은 원래 장소가 아니라 서울의 경복궁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경복궁에서 여러 전각들을 파괴하고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면서 지광국사탑을 경복궁 행사장에 장식용으로 세워 놓았다. 지광국사탑은 그렇게 경복궁에 자리 잡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상처가 아무는 듯 했지만 6·25전쟁 때 이 탑은 폭격을 당했다. 몸체 일부만 남고 상륜부와 옥개석이 무참히 부서졌다. 1957년 시멘트를 이용해 부서진 조각들을 붙이고 사라진 부분을 채워 넣는 보수작업이 이뤄졌다.

2005년 경복궁에 있던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에 새 건물을 짓고 옮겨갈 때의 일이다. 경복궁 경내에 있던 석조물들도 모두 새 박물관으로 옮기기로 했다. 그러나 지광국사탑은 이전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것을 옮기려면 부재(部材)를 해체해야 하는데, 이 탑은 상태가 너무 나빠 해체하다보면 자칫 와르르 무너져 버릴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경복궁에 남게 된 지광국사탑은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고 문화재청은 결국 해체 수리하기로 했다. 2016년 해체해 현재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수보존처리 중이다. 최근 문화재청은 이 작업이 끝나면 탑을 고향인 원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원래 자리인 절터로 보낼지, 인근 전시관 내부로 보낼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원래 위치를 중시한다면 야외의 절 터로 보내야 하고, 보존을 중시한다면 전시관의 실내로 들여보내야 한다. 모두 장단점이 있다. 그렇기에 어려운 선택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이 있다. 지광국사탑 100년의 유랑과 수난을 진정으로 돌아보는 방식이 무엇인지, 이에 대한 깊은 고민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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