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수필가

 

[백목련] 이향숙 수필가

손이 곱다. 여름 내내 담장 아래를 환하게 밝히던 봉선화가 그대로 피어났다. 해실거리며 자랑을 늘어놓는 칠순의 안노인이다. 그의 해맑은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추억 속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일터에서 점심을 먹고 짧은 오수午睡를 즐겼었다. 오히려 피곤이 가시지 않고 찌뿌둥하여 책을 읽기도 하고 친구들과 소통을 하기도 한다. 그것도 내키지 않는 날은 산책을 한다. 봄, 가을은 선선하여 걸을 만하다. 하늘의 구름을 탐하기도 하고 자투리땅에 심어놓은 채소가 자라는 모습에 감탄하기도 한다. 들꽃이 애잔하게 피어있으면 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보내준다. 하지만 겨울과 여름은 날씨 탓에 휴게실을 벗어나기 쉽지 않다. 출근길에 우연히 주유소 담장 아래 안노인이 가꾸는 봉선화를 만나게 되어 용기를 내었다. 이런 고향의 마당 한 켠을 닮은 풍경을 오랫동안 지나다니면서도 보지 못했다. 자동차로 출퇴근을 하기도 하고 그만큼 섬세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담장아래까지 가는 길은 뜨거운 햇볕을 손으로 가리고 천천히 걸어도 채 오 분이 걸리지 않는다. 햇볕보다 두려운 것은 풀어놓고 키우는 송아지만한 개가 종종 어슬렁거린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펴야 한다. 그럼에도 마음은 저 혼자 달음박질하여 꽃밭의 경계를 만들어 놓은 작은 돌을 의자삼아 기다리고 있다. 하얀 벽면에 수채화처럼 곱게 물든 봉선화가 보이면 그제서야 안도한다. 초록의 잎사귀들 사이에 분홍빛으로 피어 난 그리움 같은 것들이 울컥 올라온다. 고만고만한 계집아이들이 모여 앉은 풍경이 어릿하다. 설익은 찐 감자처럼 어설픈 손톱 위에 어머니가 다시 들여 주던 봉숭아 꽃 물이 그립다.

한가위가 지나고 꽃잎을 얻어 볼 요량으로 담장아래를 찾았다. 주인도 보이지 않고 꽃잎은 떨구어졌다. 꽃 진 자리에 씨앗 주머니가 콩알 만 하다. 어미가 되었다. 수태한 꼬투리는 한껏 부풀어 오르고 있다. 아직은 뜨거운 햇볕을 맘껏 받으며 가끔 지나는 바람으로 땀을 식힌다. 무던하게 서 있는 것 같지만 그는 아마도 발가락에 온 힘을 다해 양분을 끌어 모으고 있을 것이다. 내가 어미가 되었을 때 그러했듯이 온통 씨앗을 지키는 일에만 열중하리라. 나름의 태교이며 숭고한 모성애이다. 그러고 보면 그 누구도 저 혼자 자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물며 열매 맺는 것은 어떠할까.

안노인은 반평생을 남편의 일터를 가꾸었단다. 커다란 화분에는 사시사철 꽃을 피웠다. 손바닥 만 한 흙이라도 보이면 호박모종이나 고추모종을 내었다. 버려진 스티로폼에 상추를 심어 여름 내내 밥상에 올리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봉숭아를 거르지 않고 가꾸어 지나는 이들에게 추억을 선사했다. 여름의 끝자락에는 연례행사처럼 열손가락 끝을 곱게 물 들였다. 담장은 가족을 지키는 울타리임을 부정 할 수 없다. 하지만 봉숭아 꽃밭은 누군가의 아내나 어머니가 아닌 당신만의 추억이다. 새털 같은 나날 중에 행복에 겨운 날은 감사함으로, 가슴 저미는 날은 또 그런 대로의 감사함으로, 담장 아래 꽃밭을 가꾸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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