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숙 원광대 서예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충청시평] 정현숙 원광대 서예문화연구소 연구위원

19세기 청나라의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1894년 7월 청일전쟁이 발발했고 이듬해 4월 청나라가 패했다. 패전 후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의 여파로 청나라 영토가 열강들에게 조차(租借)되자 백성들은 망국의 위협을 느꼈고, 하급 관리와 지식인들은 나라의 위기 탈출 해법을 개혁에서 찾기 시작했다. 앞서가는 서양의 제도를 자국의 정치, 경제, 교육 제도 전반에 적용시키자는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제자 양계초와 함께 그 개혁 의지를 정치 운동으로 발전시킨 인물이 바로 강유위다.

중앙에서 먼 광동성 남해 출신 강유위는 명문가에서 태어난 덕분에 유가 교육을 많이 받았으며, 서학(書學)에도 박식했다. 1888년 그는 광서제에게 첫 상서를 올려 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했으나,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크게 낙담했다. 실의에 빠져 북경에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할 때 친구 심증식이 이렇게 충고했다.

"이런 시기에는 자신의 학문에 힘써야 한다. 어느 시대나 진정한 도는 크기를 따지지 않는다. 작은 것은 큰 것의 근원이 되고, 큰 것은 작은 것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너무 고민만 하지 말고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차근차근 연구하면 작은 주제로도 큰 도를 이루 수 있다."

벗의 말을 들은 강유위는 크게 깨닫고 이전의 생각에서 벗어나 마음을 안정시키고 글씨 공부에 열중하면서 고증학으로 인해 성행한 금석학 연구의 일환으로 비(碑)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889년 역대 최고의 서론서 <광예주쌍집>을 완성함으로써 중국 서예사에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겼다.

개혁을 포기하지 않은 강유위의 거듭된 상서가 189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광서제의 마음을 움직였다. 첫 상서 후 10여 년만의 일이다. 진보적 생각이 담긴 그의 상서들이 서태후와 보수 정치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혁신적 친정을 펼치고 싶었던 광서제의 의지에 불을 지핀 것이다. 광서제가 수구파 대신들을 파직시키자 위기를 느낀 서태후는 광서제를 연금하고 변법파 체포령을 내렸다. 원세개의 배신으로 광서제의 변법은 결국 좌절되었고 강유위는 양계초와 함께 일본으로 도피하여 15년간 망명 생활을 했다.

서양의 제도를 적극 수용하여 부국강병을 꾀하려 한 변법자강 운동은 국내적으로는 개혁파와 수구파, 광서제와 서태후, 한족과 만주족의 갈등으로, 국외적으로는 영국과 러시아의 대립 등으로 복잡하게 얽혀 결국 103일 만에 막을 내렸다. 강유위는 분명 중국 근대사에서 실패한 정치가로 기록되겠지만, 힘든 시기에 좌절하지 않고 작은 도를 실천한 결과물인 <광예주쌍집>으로 인해 5천 년 중국 서예사에서는 걸출한 비학자로 평가된다.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큰 것만 추구하고 작은 것은 홀대한다. 작은 것이 모이면 큰 것이 된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간과하기 때문이다. 큰 것은 큰 대로, 작은 것은 작은 대로 각각 고유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 작은 도라고 어찌 중요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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