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의보 충북교육학회장·교육학박사

[충청의창] 심의보 충북교육학회장·교육학박사

기계적이고 강제적인 평등이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절대적 교육평등이 능력 위주의 시장사회를 대신할 유일한 대안인가?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으면서 재능과 소질의 불공정할 분배를 바로 잡을 수는 없는 것인가? 절대적 평등은 개인의 차이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인격을 도식화한다. ‘커트 보네거트’의 『해리슨 버거론 (Harrison Bergeron)』은 평등에 의해 인간파괴를 경고하는 단편소설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2081년이다. 모든 사람이 마침내 평등해졌다. …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똑똑하지 않고 더 잘 생기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더 힘이 세거나 더 민첩하지 않았다. 이처럼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철저한 평등은 미국 『평등관리국』 요원들의 끊임없는 감시 활동으로 이루어낸 성과이다. 평균 이상의 지능을 가진 사람들은 귀에 정신 장애용 수신기를 끼고 다녀야 한다. 정부에서는 매 20초 간격마다 일괄적으로 갖가지 날카로운 장애 전파를 송신한다. 두뇌가 좋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부당한 이득을 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열 네 살의 소년 해리슨은 똑똑하고 잘 생기고 재능이 많았다. 따라서 그는 누구보다 무거운 장비를 쓰고 다녀야 했다. 커다란 이어폰과 도수 높은 안경에 잘 생긴 얼굴을 가리기 위해 코에 빨간 고무공을 끼고 눈썹을 밀고 하얀 이에는 검은 덮개를 씌우고 군데군데 뻐드렁니를 박았다. 육체적 힘을 줄이기 위해 몸에 무거운 고철을 둘렀다. 어느 날 그는 모든 장비를 벗어던지고 평등주의 횡포에 맞서 영웅적으로 저항한다. 결국 『평등관리국』 요원들에 의해 사살된다. 해리슨의 부모는 감시전파에 의한 사고의 기능 마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곧 잊어버리게 된다.”

‘드 트라시’에 의해서 처음 사용된 ‘이데올로기’ 개념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허위의식’이라는 의미로 주로 사용하고 있다. 교육의 본질에 의거할 때 교육평등 이데올로기는 일종의 '허위의식'이다. 인간의 능력과 소질은 차이가 있고, 교육의 유일하고도 가장 중요한 공헌은 인간이 자기의 재능에 가장 잘 어울리고,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고 만족을 느낄 수 있는 분야를 향해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교육평등은 사람들의 타고난 재능을 사회의 공동재산으로 여기고 그 재능을 활용해 어떤 이익이 생기든 그것을 공유하자는 것이다.

교육평등은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를 공정하고 법적 합리성에 근거해 이용하자는 것이다. 우리의 사회와 교육계는 이제 교조적인 이념적 허울, 상투적 허위의식에서 벗어나 역사에 대해 보다 책임있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재능있는 사람을 격려하고 개발하여 이용하게 하되, 그 재능으로서 시장에서 거둬들인 대가를 공동체 전체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롤즈’는 『정의론』에서 말한다. “가장 빠른 주자에게 족쇄를 채우지 말고 최선을 대해 달리게 하라. 단, 우승은 그만의 것이 아니라 재능이 부족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점을 미리 알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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