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수요단상] 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최근 전 세계의 이목이 홍콩에 집중되고 있다. 홍콩과 중국의 대결, 누가 봐도 결과가 뻔한 싸움이다. 그런데도 왜 홍콩의 시민들은 불가능에 가까운 이 싸움을 시작했는가? 자유를 향한 홍콩시민들의 열망이 생각 이상으로 거대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길 수 있는 싸움이기 때문에 시작한 것이 아니라 자유를 향한 갈망 때문에 그들은 지는 것이 당연한 싸움일지라도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홍콩의 사태가 보여주듯 자유를 향한 인간의 열망은 쉽게 가늠할 수가 없다. 때로는 심지어 자유를 얻지 못할 바에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자유에 대한 열정이 생명에 대한 마음을 뛰어넘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생명을 걸고서라도 쟁취하려고 하는 그 ‘자유’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유를 원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바라고 생각하고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그 자유의 모습이 무엇인지 한 번 따져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많은 범죄가 자신의 자유를 이용하여 타인의 자유를 빼앗으려는 과정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나의 자유를 위해 타인을 노동이라는 자리에 속박시킨다. 나의 자유를 위해 타인을 경제적 빚에 속박시킨다. 나의 자유를 위해 타인의 시간을 빼앗고 공간을 빼앗는다. 이런 형태의 행동이 국가 단위로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전쟁’이라고 부른다.

결국 홍콩의 사태도 다르지 않다. 어느 한쪽이 보다 더 자유롭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이 자신이 누리고 있던 자유의 권리를 어느 정도 양보하거나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홍콩은 중국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고 싶고, 중국은 홍콩을 다른 간섭 없이 자유롭게 통치하고 싶은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원하지만 그 자유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이 자유는 어떤 이들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자유를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21)

사도 바울은 자신은 참된 자유를 누리고 있는데, 이 자유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종’이란 자유를 속박당하여 주인에게 복종해야 하는 사회 계급을 가리킨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다른 사람의 종이 된 것은 자유를 속박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자유롭게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자신에게 허락된 자유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의 눈에 비친 바울의 모습은 마치 자유를 잃어버리고 주인의 명령에 따라 살아야 하는 종과 같이 보이지만 사실 바울은 자신의 섬김은 주인에게 복종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표현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우리에게 있어 자유란 무엇인가? 만약 내게 이 시간 이후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그 자유를 통해서 어떠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가?

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것도 자유이지만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도 내 자유다. 자유는 반드시 내 자신만을 위해 써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자유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이들이 기쁨과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하는 모습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선택을 통해서 여러분의 자유가 더 많은 이들에게 기쁨과 유익이 되도록 노력해 보라. 그럼 이 세상은 분명 지금 이 순간보다 한층 더 밝고 행복할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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