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수필가

 

[백목련] 이향숙 수필가

겨울옷이라 서 너 벌인데도 이만저만 무거운 게 아니다. 어두운 장 안에 방치되었던 서러움에 눈물 젖은 것인지 눅눅한 느낌이 상쾌하지 않다. 꿉꿉한 냄새까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래도 갓난아이 안듯이 조심스럽게 안아 아파트 정원을 가로 지르며 걸었다. 팔이 뻐근할 즈음 세탁소에 도착했다. 몇 번 세탁물을 맡겼었지만 그새 주인이 바뀌었는지 못 보던 얼굴이다. 안쪽으로 길게 작업대를 낸 수선집도 인상 좋게 반겨주던 아주머니 대신 중년 남성의 미소가 어색하다. 들고 나올 수도 없고 쭈뼛대며 치수를 쟀다. 당장 입을 옷이 아니어서 여유 있게 약속을 잡았다.

하루 늦게 수선 집으로 향했다. 하루정도 늦어 질수도 있겠다 싶었고 걷기엔 부담스런 거리여서 될 수 있으면 한 번에 해결하고 싶어서 이다. 예전엔 소매가 길면 몇 번 접어서 입었는데 나이를 먹다보니 거추장스러워졌다. 손목을 약간 덮을 정도로 수선을 부탁했다. 여자의 마음은 이런 것인가. 아니면 내가 지나치게 소박한 것인가. 어찌되었던 버리기엔 아까워서 한쪽으로 밀어 두었던 그들의 새로운 모습은 어떨까 궁금해진다.

실내는 어두운데 출입문은 열려 있다. 혹시나 싶어 들여다보았더니 수선 집 한쪽만 등이 켜져 있고 재봉틀을 돌리고 있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한쪽발만 들여놓고 멋쩍게 인사를 했다. 그도 수줍게 웃으며 들어오란다. 기대감에 성큼 들어섰다. 이리저리 뒤적이더니 난감한 표정이다. 너무 바빠서 손도 대지 못했단다. 썩 내키지는 않지만 말미를 주기로 했다. 다시 시간을 내어 걸어 올 생각을 하니 속상했지만 한마디 타박도 못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사람이 하는 일인데. 서운한 마음을 달래며 억지미소를 지었다.

하늘은 코발트빛이다. 시간은 정오를 향하고 있다. 출근하기 싫을 만큼 차창 밖은 아름답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은 날이다. 하지만 한동안 가을장마로 어수선했던 매장이 걱정되어 결국 일터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실한 최고의 상품으로 보이는 배추가 속이 녹아내려 소박맞아 되돌아 왔다. 상한 물건을 팔았다고 언성을 높이는 고객 앞에서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더구나 어제 저녁나절 추천해주어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날씨 탓만 하는 목소리가 기어들어 간다.

세상을 살다보면 수많은 약속을 하게 된다. 멀리계신 부모님에게는 자주 찾아뵙겠다고, 자식에게는 한 발작 물러서서 지켜보겠다 한다. 직장에서는 동료지간에 경쟁보다는 함께 이루어 내자한다. 수선 집처럼 고객과의 약속도 있겠다. 거래처에서 물건 배송이 늦어져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순전히 우리의 실수로 불편을 드리기도 한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손도 대지 못한 옷을 다시 부탁하며 사람 좋게 웃었는지도 모른다.

수선 집에서 만난 주인장은 새 단장을 한 옷들을 보며 흡족해 하는 내게 약속을 지키느라 밤새워 일했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 모습이 싫지 않다. 한결 가까운 이웃이 된 듯하다. 나도 계절이 바뀌기 전 옷장을 정리해 한보따리 들고 방문하겠다고 기약 없는 약속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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