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옥 수필가

 

[기고] 김선옥 수필가

연일 수은주가 35도 이상 올라가고 하루에도 몇 번씩 찬물로 몸을 식혀주어야 제 정신이 들던 지난 여름날. 더위를 먹으며 익어가던 텃밭의 고추를 보면서 ‘자연이 만들어 놓은 빨간색은 어쩜 저리도 고울까?’ 생각했다.

지난 겨울 친정어머니께서 증손자에게 태어난 첫 선물로 짜 주신 조끼도 빨간색이었다. 아마도 어머니는 마지막 작품을 짓는 심정으로 조끼의 코를 세고 무늬를 놓으셨을 게다. 문득 갓난아이의 탄생과 노모의 얼마 남지 않은 삶, 죽음이란 어휘들이 내 마음에 무거운 주제로 다가온다. 익어가는 빨간 고추를 바라보며 떠올리게 되는 나의 여름나기는 자연 속에서, 자연에 거슬리지 않는 그런 시절이었다고 기억된다.

우리 집은 서울의 말 공장 근처였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지금의 동대문 운동장에 말 사육장이 있어서 사람들이 “말 공장” 이라고 불렀고 자주 경마 경기로 분주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지는 틈에 동생의 행방이 모호한 적도 있었다. 나중에 그 시설이 옮겨 가고 새롭게 갈무리된 운동장이 들어섰다. 축구나 야구 아니면 육상 경기 등 각종 경기가 열리는 날에 운동장 담 넘어 들려오던 응원의 함성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 귀에 선하다. 세월은 또 흘러 지금의 그 곳은 의류 가방 신발 가죽제품 등 온갖 물건들이 팔리는 한국의 패션 도매시장으로 바뀌었다. 중국 사람이나 러시아 사람 등 외국인들도 많이 오고 전국에서 모여드는 옷 장사들로 늘 붐비던 곳이 됐다.

지루하던 어린 시절 그 당시에 부모님은 생업에 매달려 아이들이 크는 줄 아셨을까? 방학이면 막내 이모와 칠남매 중 맏이인 시집간 큰 이모네 집을 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한 살 위인 막내 이모는 또래보다 크고 예쁘고 야무지고, 작고 못 생기고 어리숙하던 내게 선망의 대상 이었다. 나는 막내이모만 있으면 겁날게 없었다.

드디어 초등학교 오학년 여름방학 때, 막내이모와 남동생과 나주에 사는 큰 이모네로 놀러갔다. 집 안마당에 커다란 감나무가 우뚝 솟아있었다. 가지가 늘어지도록 많이 달린 감꼭지를 보고 나는 왜 나비를 떠올렸던지 지금도 생생하다. 설익은 풋감을 따서 씹고는 입안 가득 떫은맛의 고약함이란 ....

시골에서 방학 중 재미는 채를 들고 매미를 쫓아다니다 돌아와서 김이 폴폴 올라오는 수제비와 함께 먹던 열무김치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장독대 근처에 봉숭아꽃이 피었다. 빨간 꽃과 잎을 따서 백반, 소금을 넣고 찧어 손톱 위에 얹고 호박잎으로 손가락을 감싸 꽃물이 흐르지 않게 실로 동여매고는 조심스럽게 가슴에 손을 올리고 아침이 오기를 기다린다. 너무 꼭 묶어서 손가락이 저렸음에도 예쁘게 물든 손톱을 보려고 잘도 참던 날을 생각하며 입가에 미소가 피어나곤 한다.

어떤 날엔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조개잡이도 갔었다. 장비라고 해 봐야 함석 양동이와 막대기, 매미채가 전부였다. 그 때의 영산강은 물이 맑고 얕아서 물 속 모래알갱이까지 다 들여다보였었다. 물은 내 무릎보다 약간 깊은 정도여서 치마를 돌돌 말고는 모래 속을 휘저으며 조개를 잡던 기억이 새롭다. 옷이 젖었지만 개의치 않고 화사한 웃음을 담던 아이들 모습이 아직 생생하다.

반세기 지나도록 직접 가보지 못 했지만 가끔 인터넷으로 영산강을 찾아보면 강은 오염되어 예전에 알던 영산강이 아니라는 슬픈 현실을 접하게 된다. 그렇게 맑던 모래알갱이가 물빛에 반짝이던 모습은 이제 찾을 수 없다. 어린 날의 추억이 아련히 떠오르면 그때의 그 사람들이 궁금해진다. 노인이 되어있을 그들, 지금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

노랫말처럼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가다가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면 좋겠다. 다시 만나 맑아서 반짝이는 강가에서 조개를 주우며 펄펄 끓는 태양도 그저 따스한 햇볕에 지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혹여 손톱에 빨간 봉숭아물을 들여 반달이 되면 그 소원이 이루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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